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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를 상징하는 곳 ‘달성 태고정’

문화재 : (보물) 달성 태고정(達城 太古亭)
소재지 :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번지

  • 기사입력 2024.03.25 22:23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육신사
▲ 육신사

[한국NGO신문=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의 묘골에는 사육신 성산문,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박팽년을 제향하는 육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육신은 조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죽은 6명의 관리이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사육신을 비롯하여 많은 문·무신은 단종 복위를 결의했다. 13세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에 야심을 품고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을 통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먼저 영의정 황인보, 좌의정 김종서 등을 살해하고, 1455년 6월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를 분개한 6신을 비롯해 문·무신은 단종 복위를 결의하기까지 하였다. 

▲ 태고정
▲ 태고정

세조가 단종을 상왕으로 모시고 명나라 사신을 창덕궁에 초청하는 자리에서 성승(성삼문 아버지)과 유응부을 별운검으로 임명하자 곧 그 자리에서 거사하여 세보와 그의 측근 등을 제거하고 단종을 상왕으로 복위시키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한명회의 주청으로 장소가 협소하다 하여 별운검을 폐지, 왕세자도 질병으로 연회 자리에 나오지 못하게 되자 거사는 미루어지고 말았다. 이때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사예(司藝) 김질(金礩)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이 사실을 알리니 정창손이 즉시 김질과 함께 대궐로 가서 반역을 고발하였다. 

▲ 태고정 정면
▲ 태고정 정면

세조는 박팽년, 성삼문,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을 직접 국문하였다. 세조가 형을 가하기 전 김질을 시켜 술을 가지고 옥중에 가서 옛날 태종이 정몽주에게 불렀던 시조를 읊어 박팽년을 시험하게 하였으나, 박팽년은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야광명월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라는, 그의 곧은 절개를 나타내는 시조를 지어 응답하였으며 이후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유성원과 허조는 거사 실패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결하였고, 성산문과 이개, 하위지, 유응부 등은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 태고정 현판
▲ 태고정 현판

육신사는 박팽년을 봉안하기 위해 건립된 하빈사(河濱祠)에서 출발하였다. 1679년(숙종 5) 박팽년을 비롯한 하위지, 이개, 성삼문, 유성원, 유응부를 위한 사당을 짓고 봉사하게 되었다. 1691년(숙종 17) 별묘와 강당을 건립하고 도내 유생들의 소청으로 1694년(숙종 20) ‘낙빈’이란 현액을 하사받아 사액 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훼철된 것을 1974~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정화 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름도 육신사로 바뀌었다. 실제로는 사육신 뿐만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박중림의 위폐도 봉안하고 있는 관계로 사당에는 ‘숭정사(崇正祠)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 일제루 현판
▲ 일제루 현판

육신사는 묘골 아름 마을 가장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경내 건물로는 외삼문과 숭절당(崇節堂), 사랑채 2동, 내삼문인 성인문(成仁門), 사당인 숭정사(崇正祠), 태고정(太古亭), 태고정 안채 등이 있다. 숭정사는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태고정은 팔작지붕과 맞배지붕이 조합된 부섭지붕의 건물이고, 태고정의 안채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 태고정 완쪽 측면
▲ 태고정 완쪽 측면

태고정이 있는 일대는 박팽년 직계 후손들이 모여 사는 박씨 집성촌으로 흥(興)자 모양 99칸 종택에 딸린 건물이다. 태고정을 일명 일시루(一是樓)라 부르는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1479년(성종 10)에 종택과 사우, 정자를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태고정은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614년(광해군 6)에 박종남이 옛터에 종택과 정자를 다시 짖고 그의 아들 박숭고 때에 정자 이름을 태고정이라 하였다. 

▲ 태고정 오른쪽 측면
▲ 태고정 오른쪽 측면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된 후 1447년에 문과 중시에 을과로 다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 우승지, 이듬해 형조참판, 1455년(세조 1) 충청도 관찰사, 이듬해에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세종 때 신숙주, 유성원, 최항, 하위지, 이개 등 당대의 젊은 학자들과 함께 집현전의 관원이 되어 경술과 문장,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박팽년은 1755년(영조 31) 충신 정려를 받았고, 함께 죽임을 당한 둘째 아들 박순과 박순의 유복자였던 박일산은 1831년에 정려를 받았다. 

▲ [태고정 정면의 판문
▲ [태고정 정면의 판문

태고정 건물은 막돌로 줄눈을 맞추지 아니하고 불규칙하게 쌓은 허튼층쌓기를 한 축대와 장대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앞면 4칸 가운데 왼쪽 2칸은 온돌방이고, 오른쪽 2칸은 대청을 두었다. 왼쪽 끝에는 앞면 1칸, 옆면 1칸의 온돌방이 있고, 그 뒤쪽에는 같은 크기의 부엌이 배치되었다. 온돌방의 오른쪽으로는 앞면 1칸, 옆면 2칸의 길고 네모난 또 다른 온돌방이 배치되었고, 오른쪽 끝에는 앞면 2칸, 옆면 2칸의 대청이 있다.

▲ 태고정 마루
▲ 태고정 마루

기단 위에 가공 없이 그대로 사용된 주춧돌 위에 착시현상을 교정하기 위해 기둥의 중간 부분을 상하보다 굵게 한 배흘림 두리기둥이 서 있는데, 기둥의 윗부분은 창방을 놓아 결구하였다. 기둥머리는 굽면이 비스듬히 끊기고 굽받침이 없는 주두를 올렸다. 그 아래에는 끝부분이 날카로운 쇠서 하나를 밖으로 내고서 대들보 머리를 받치게 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조선 전기의 건실한 초익공계 가구로 보이지만, 모서리 기둥에는 익공이 없다.

▲ 태고정 분합문과 마루
▲ 태고정 분합문과 마루

건물의 가구법은 가옥에서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5량가이다. 앞뒤의 평주 위에 대들보를 걸고서, 기둥머리에서 운문의 초새김한 보아지를 내어 대들보 밑을 받치게 하였다. 또한 동자주를 대들보 위에 세워 마룻보(종보)를 받쳤다. 온돌방 쪽의 가운데 기둥도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에 주두를 얹고 좌우 양쪽으로 첨차를 빼서 벽의 윗부분을 가로지른 대들보를 받치게 하였다. 이러한 가구는 조선 전기에 건립된 강릉 오죽헌(보물) 건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종보 위에는 토막나무를 겹쳐 만든 판대공에 첨차를 두어 종도리를 받쳤으며, 옆면 가운데 기둥의 머리에서는 도리와 보에 걸쳐 동자주를 받는 곡선의 보인 아름다운 우미량이 연결되어 대들보 위에 걸쳐 있다.

▲태고정 초석과 배흘림 기둥
▲태고정 초석과 배흘림 기둥

대청의 바닥은 세로로 놓는 가장 긴 장귀틀과 장귀틀 사이에 가로로 걸친 짧은 동귀틀로 짠 우물마루이다. 대청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지만, 합각머리 부분은 우물천장이다. 대청의 앞면은 개방되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문짝의 틀에 널판자를 끼운 골판문을 달았을 것으로 보인다. 대청 앞면의 기둥 사이에는 2층의 평난간을 설치하였다. 온돌방 쪽의 지붕은 벽이나 물림간에 기대어 만든 지붕인 부섭지붕을 온돌방 쪽의 박공지붕과 잇대었고, 대청 쪽의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하였다. 팔작지붕에는 겹처마를 두었던 반면, 부섭지붕은 홑처마로 마무리하였다.

▲ 퇏마루와 댓돌
▲ 퇏마루와 댓돌

건물에는 ‘太古亭(태고정)’ 현판과 ‘一是樓(일시루)’ 현판이 걸려 있다. 대청마루에는 박팽년의 절의를 상징하는 곳으로서 건립 이래로 많은 문사들이 방문하여 시문 등을 남겨 놓았다. 임진왜란 때 태고정이 있는 마을이 왜적에 의해 초토화되었는데, 유일하게 박팽년의 사당만이 남았다고 한다. 정유재란 후 명나라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걸려 있고, 당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1533~1601)가 치찰사(治察使)로서 이곳을 방문하여 시를 한 수 남겼다고 하는데, 그 시가 편액으로 태고정에 게시되어 있다. 

 亂後人家百不存 난후에 인가는 백에 하나 남지 않았는데

 數間祠宇倚山根 두어 칸 사당이 산기슭에 서 있네

 神明自是蒼天佑 신명도 감동하여 하늘도 도와주시기

 虜火何能震廟魂 오랑캐 불이 어찌 사당의 혼을 두렵게 하겠는가

▲ 태고정 천정
▲ 태고정 천정

이 건물은 규모가 크지 않지만, 세부 부재의 가공이 정교할 뿐만 아니라 초익공계의 정교한 가구 구성을 갖추었기에, 건축사적 가치를 지닌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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