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조화롭게 적용된 별당, 동춘당

(국가 민속문화재) 동춘당(同春堂)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80 (송촌동, 대전 동춘당 종택)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기사입력 2022/01/13 [09:38]
> 정진해의 국보와 보물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이 조화롭게 적용된 별당, 동춘당
(국가 민속문화재) 동춘당(同春堂)
소재지 : 대전광역시 대덕구 동춘당로 80 (송촌동, 대전 동춘당 종택)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기사입력  2022/01/13 [09:38]

▲ 동춘당 알각문[한국NGO신문 정진해 기자]  

  

숲이 무성한 나직한 언덕을 뒷배경으로, 앞에는 별도의 구획을 두고 별당인 동춘당이 자리하고 뒤로는 별도의 대문을 두고 동춘당을 바라보면서 남쪽으로 트여 있는 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고택의 구획 내에는 사랑채를 비롯하여 안채, 2채의 사당으로 구성된 전통한옥이다.

  

이 집의 주인인 동춘 송준길(1606~1672)은 조선의 석학이고 예학자로, 지평을 세 차례, 진선을 여섯 차례, 집의와 찬선을 각각 일곱 차례, 대사헌을 스물여섯 차례, 참찬을 열두 차례, 이조판서를 세 차례 제수받았던 인물이다. 선조 391228일에 부친 송이창은 46, 모친 광산 김 씨(첨추 김은휘 따님)42세 사이에서 서울의 정릉동(, 정동) 황강 김계휘의 집에서 태어났다. 동춘은 몸이 약해 평생 병을 달고 살았다. 16세에 모친을 여의고, 22세 때 부친까지 여의었다. 162310월에 정경세의 막내딸과 혼인하여 24녀를 두었으나 12녀만 살아남았다.

 

동춘은 많은 관직을 거치고 1670년 세자의 관례식에 참석한 뒤 낙향하였으며, 이후 회덕 향리에 은거하다가 1671년 지중추에 제수되었고, 1672년에 동춘당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향년은 66세로 연기 죽안리에 안장되었으나, 1700년 진잠현 사점동(현 대전시 서구 원정동)에 이장되었다. 저서로는 <어록해>, <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 남양의 윤계순절비문 등이 있다.

 

동춘당 건물 최초 창건 시기는 1617(광해 9)이며,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은 시기는 1649(인조 27)이고, 중수한 시기는 1709(숙종 35)이다. 최초 동춘의 부친 송이창이 세웠으나, 일부가 허물어져 있던 것을 1649년에 동춘이 44세가 되던 해에 중건하여 별당으로 사용되었다. 남향으로 배치된 건물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조화롭게 적용하였음을 보여준다. 토석담을 쌓고 그 위에 기와로 덮은 담으로 구획을 만들고 맞배지붕의 일각문을 세워 출입하도록 했다.

 

▲ 동춘당 

  

문을 들어서면 멀찍이 물러선 위치에 동춘당이 자리하고 있다. 네모나게 다듬은 돌로 낙숫물이 떨어지는 위치에서 안쪽으로 1단의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방형 주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워 대들보를 받치고 있는 대량식 구조이다. 방의 전면과 대청의 전면, 측면, 뒷면에는 좁은 툇마루를 달고 난간은 설치되지 않았다. 정면 3,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 날개를 펴듯 사방의 추녀가 살짝 들렸다. 지붕에는 수막새와 암막새를 사용하지 않았다.

 

우측 4칸은 대청을, 좌측 2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는데 북측 상부에 반침을 내어 붙였다. 이러한 구조는 뜨겁고 습한 여름 기후에 대응하기 위해 바닥을 지면에서 들어 올려 마루를 만들어 그 사이로 바람의 이동을 쉽게 하였고, 또 한쪽에는 겨울을 대비하여 온돌을 꾸몄다. 이 두 공간은 사시사철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한 중요한 문화 공간을 생각했던 것이다.

 

동춘당 건물에 사방의 문과 창은 자연의 빛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 크기와 모양을 달리했다. 남쪽은 해를 많이 받도록 하기 위해 창을 크게 만들고, 문 하단의 나무 판장도 높지 않게 댔다. 반면에 동쪽의 창은 아침 햇살이 강하게 스미지 않도록 문 아래 판장을 높게 달았다. 서쪽은 지는 해가 닿는 곳이므로 창문을 달지 않고 문을 달아 두었다.

 

대청의 전면 창호는 띠살창의 들어열개인데, 이것은 외부의 자연공간과 내부공간이 하나로 되어 내부공간에 앉아 있지만, 외부공간과 하나가 되어 자연 속에 앉아 있는 것이 된다. 들어열개 중 하나는 작은 들창을 달아 동절기에는 들어열개 4분합문을 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방의 창호는 띠살의 여닫이창이다. 창 아래는 4칸의 머름을 마련하였는데 높이는 방에서 앉아 팔이 편안하게 놓일 수 있을 만큼의 높이며, 툇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갈 때 발이 걸리지 않을 정도의 높이다. 이 머름은 신체적 편안함과 심리적 안정감을 주며 사생활 보호 역할도 한다. 일반적으로 머름은 가구식기단을 만들듯 짜 맞추는데 기둥 사이에 인방재를 위아래로 보내고 그사이에 짧은 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세운 다음 기둥 사이는 얇은 판재로 막는다. 머름이 있으면 출입을 하지 않음으로 문이 아니고 창이다. 두 개의 문이 있어 쌍 영창이다. 밖에서 방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내부공간에서의 행위를 될 수 있으면 남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가장 자연스러운 기능과 구조로 되어있다.

▲ 동쪽 측면에서 본 동춘당 

 

동춘이 온돌방에 앉아 쌍창을 활짝 열어보면 일각대문이 활짝 열려 있는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바로 송촌의 풍광이다풍광의 반은 토석담에 기와를 올려 또 하나의 공간이 주위를 둘려 절제된 안 공간을 보고또 반은 바깥 공간을 볼 수 있다즉 일각대문이 활짝 열렸을 때는 안과 밖의 공간을 모두 볼 수 있고일각문이 닫혔을 때는 안의 공간에서 자연의 풍광을 느낀다양창의 가운데 세워둔 설주는 문으로 풍광을 선택해 볼 수 있도록 그 반을 설정해 두었다설주를 중심으로 반과 그 반은 전혀 다른 경관을 볼 수 있지만동춘이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어떤 문이 열리게 될지는 오직 주인만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별당 건축은 주택 내에서 사랑채의 역할로 가장 다목적 용도로 이용되는 건물이다. 외부의 손님을 접객하고, 책을 읽고, 자연물이나 예술품 따위를 보고 즐기는 목적이 있음으로 이에 알맞은 경승지를 택하고 나무를 심고 인공 연당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작은 산을 만들어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별당채는 주로 공동 대화의 장소,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서의 모든 역할을 행한 것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동춘당은 독서와 강학, 집회소의 기능을 겸비하였으며, 송준길이 말년에 송시열, 송규렴이 주도하여 이곳에 모여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들었다. 이 향약은 1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향안과 향약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는데, 향안의 서문은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으며, 향안 뒤에 첨부된 향약의 서문은 송규렴이 썼다. 향약에는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 구체적인 시행 세칙을 수록하였다. 부록으로 향약 조직의 규약을 수록하여 향약의 조직과 운영 등에 관해서 설명하였고, 벌칙 조항에서는 극벌(極罰), 상벌(上罰), 중벌(中罰), 하벌(下罰), 하차벌(下次罰) 등으로 나누어 세부 조항을 기록했다.

 

▲ 동쪽 편 사분합문  

 

굴뚝은 따로 달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서쪽 창인 머름 아래에 작은 구멍이 있다. 굴뚝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건물 뒤편의 작은 아궁이에서 불을 때면 이곳으로 연기가 흘러나온다. 나무를 때는 큰 아궁이가 아닌 숯을 피우는 작은 아궁이이다. 굴뚝을 기단부에 바짝 붙여서 작게 뚫은 것은 숯이 타면서 연기를 내더라도 그것이 위로 치솟아 올라 따뜻한 방에서 안일하게 있다고 비추어질까 염려한 유학자의 수신 의지다. 편안한 것이 자칫 안일하게 비추어질까 하여 굴뚝조차 보이지 않도록 노력한 유학자의 마음이 엿보인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은일함을 추구하는 선비의 공간에 걸맞은 굴뚝인 셈이다

 

별당인 동춘당을 앞에 두고 뒤로는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 사당을 볼 수 있도록 했다. 고택의 사랑채는 정면 6, 측면 1칸 반이며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이러한 건물은 자연과 동화하려는 공간적 심성의 깊이를 느낄 수 있고, 조영사상과 건축물의 상징성 표현기법, 공간의 계층적 질서, 공간구성과 대칭적 비대칭성 등이 한국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정을 갖추었다 하겠다.

 

▲ 우암 송시열이 쓴 동춘당 휘호 

 

건물 추녀 아래 걸려있는 同春堂(동춘당)’라 쓰인 현판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송준길 선생이 돌아가신 지 6년 후에 걸었다. ‘동춘당이란 의미는 봄과 같으라는 뜻이 담겨 있다. 봄은 양의 기운에 언제나 살아 움직이기 때문이다.

 

대청을 오르내리거나 방 앞의 툇마루를 오르내릴 때는 먼저 안전이고 다음이 자연과의 조화인 것 같다. 정면 3칸의 각각의 칸 마루 아래는 댓돌이 놓았다. 두 발을 올려 신발을 벗고 한 발을 살짝 올리면서 무릎을 구부리고 올라갈 수 있을 만큼의 댓돌을 마련하였는데, 대청마루의 뒤쪽에도 같은 모양의 돌을 같은 높이의 댓돌을 놓았다.

 

동춘당의 규범적인 건축형식은 주변에 산재한 다른 별당보다도 정갈하고 균제감을 보여주고 있다. 단아한 모습은 동춘당 선생의 인품을 대변하는 듯하다. 

카카오톡 카카오톡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 페이스북 네이버 네이버
기사입력: 2022/01/13 [09:38]   ⓒ 한국NGO신문
 
이 기사에 대한 독자의견 의견쓰기 전체의견보기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제 목
내 용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