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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칭의 멋'으로 인생을 품격있게

  • 기사입력 2021.08.15 22:34
  • 기자명 이석복
▲ 歡喜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어렸을 때 경기도 고양군 지축리의 외가에 가면 어른들이 나보다 9살 많은 외사촌형을 “말불아!”라고 불러서 어머니에게 “왜 그렇게 이상하게 이름을 부르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약간 난처하신 듯 머뭇거리시다가 웃으시면서 설명을 해주셨다. 요약하면 의술(醫術)이 덜 발달되었던 시절에 유아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손(孫)이 귀한 집에서 아들을 얻으면 전염병에 걸리지 말고 오래 살라고 천한 별명(別名)을 지어서 부르게 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외사촌을 부르던 “말불아”는 그렇게 들린 것이고, 정확히는 “말불알”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외할아버지는 고종의 후궁 엄비(嚴妃)의 가까운 친척이셨는데 두 아드님과 두 따님을 두셨다. 그런데 외삼촌인 두 아들이 외사촌형 한 분만 낳고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다보니 대(代)를 이을 아들이 귀하여 오래 살아서 자손을 번창하게 하라는 기대로 어린 시절 병들지 말고 잘 크라고 막된 별명지어 불렀던 것이다.

내가 어리던 시절에는 특히 시골에서 “개똥이”란 별명도 흔히 들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참 해학적인 별칭이었다. 일생을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신체나 행동의 특징을 이용한 별명을 갖기 시작해서 통상 두서너 개씩 보통 갖게 되는 것 같다. 우리 주변에 짱구, 꺽다리, 뚱보, 울보, 독사, 독일병정 등 별의별 별명이 많았다. 내 경우에도 초등학교 시절 코가 좀 크다고 해서 당시 동아일보의 인기연재 만평(漫評) ‘코주부’를 따서 개구쟁이 친구들이 나에게 ‘코부주’라는 별명으로 놀리곤 했었다. 그런데 다른 별명보다도 우리집안에서는 내가 행동이 약간 굼뜨고 미련하다는 뜻으로 가볍게 흉볼 때마다 이름대신 ‘곰’이라고 불렀었다. 외형적으로 ‘곰’이 좀 느리고 미련한 것으로 통상 생각들 하지만 실제로는 ‘곰’이 필요할 때 힘도 좋고 행동도 민첩하며 일면 귀엽기도 해서 내가 오히려 은근히 좋아하는 별명이기도 하다.

그후 사관생도시절에는 19살에 입학하여 동기생들보다 상대적으로 어린 편이었고, 얼굴도 동안인데다가 행동도 어설펐는지 ‘베이비(baby)’란 별명을 들었다. 사관학교 졸업식때 고등학교 친구들이 프랭카드에 ‘병아리장군’이라고 써서 축하해준 것이 눈에 띄어 초급장교 내내 그 별명을 간혹 듣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사단장 때에는 특히 원칙과 진솔을 강조하고 솔선수범을 보이려고 노력해서인지 ‘사관생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고보니 나의 인생에서 제법 별명이 많았던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하고 나서 집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마음에 드는 호칭(呼稱)이 떠오르지 않아 제법 고심을 했었다. 남들 부부사이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보”나 “임자”는 너무 어른스러운 것 같았고, “자기”는 왠지 낯간지럽고, 아직 아이가 없을 때라 “누구 엄마”라고 할 수도 없었고, 이름을 부르자니 버릇없는 것 같아서 하여튼 아내를 호칭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이름을 그대로 부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나의 별명이 ‘곰’이니까 “곰의 와이프”가 어떨까하다가 호칭으로는 적당치가 않아서 “곰's 와이프”를 줄여 “곰스와”라고 줄여서 불러볼까하는 생각을 해냈다. 얼핏들으면 그 발음이 불어(佛語)처럼 들리기도하는 아주 세련된 호칭으로 멋도 있는 것 같아 맘에 들었다. 그날 저녁에 조심스럽게 집사람에게 ‘곰스와’로 호칭하고자 하는데 어떠냐고 의향을 묻자 극구 싫다고 하지 않아서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신혼여행을 마치고 경남 진해에 있던 육군대학(소령급 장교의 필수교육과정)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같이 입교한 동기생 4쌍 부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집사람을 ‘곰스와’로 불러주기를 청했더니 다들 재미있다며 흔쾌히 동의하고 그렇게 불려졌다. 지금도 나의 아내는 별칭이 ‘곰스와’이다.

그런데 애들을 낳으면 호적명(戶籍名)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실 것이니 문제는 없었지만 나는 애비로서 애들에게 애칭으로 별명을 붙여주고 싶었다. 그때 이미 우리 가족을 ‘곰가족’으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곰스와’가 첫 아이를 갖었을 때 ‘곰의 애기’라는 애칭으로 붙여주기로 결심했다. 소의 새끼는 송아지, 말의 새끼는 망아지인데 곰의 새끼는 특별한 명칭을 들은 바가 없어서 ‘곰아지’로 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이 생각에 ‘곰스와’도 동의해줘서 태명(胎名)으로 ‘곰아지’로 부르기로 했었다. 둘째도 미리 별칭을 정해서 딸이면 ‘곰아리’, 아들이면 ‘곰아들’로 부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곰’이 성(姓)이고 ‘아’가 돌림자인 셈이었고, 결국 둘째도 아들이어서 ‘곰아들’이 되었다.

최근에 우연히 단체카톡방에 퀴즈문제가 나왔었는데 동물들의 새끼이름을 완성시키는 문제였다. 송아지, 망아지, 병아리까지는 쉬웠는데 ‘곰의 새끼’와 ‘범의 새끼’의 이름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이버에 ‘곰새끼의 명칭’을 검색하니 ‘능소니’라는 별칭이 나왔다. ‘범새끼’는 “개호주”, ‘꿩새끼’는 “꺼병이”, ‘매의 새끼’는 “초고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제와서 ‘곰아지’의 애칭을 바꿀 생각은 없다. 그 당시 최고교육을 받았다는 내가 우리 고유말도 제대로 몰랐다는 것은 부끄럽기 그지없다. 

나이가 들면서 얼마 전에 친구들 간에 호칭을 아호(雅號) 또는 호(號)로 부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가 있었다. 탁월한 제안이라고 생각한다. 늙어가면서 품위와 존중이 뭍어나는 별명으로 호를 부르는 것은 전통문화의 계승측면에서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한다. 과거의 계급이나 직책은 이미 다 지나간 일들 아닌가? 그것을 굳이 친구사이에 계속 쓰자니 자칫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법명(法名)이 ‘환희(歡喜)’인데 아호(雅號)로 써도 잘 어울리고 마음에도 들어서 그대로 쓰기로 했다. 

우리 조상님들은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본명이 남에게 가볍게 불려지는 것을 불효(不孝)라 여기는 관습이 있어서 특히 장가든 후에는 본명 대신 부르는 이름을 자(字)라고 하여 별칭을 썼다, 또는 아호를 별도로 주고받으며 품격을 존중하기도 했다. “귀하의 아호는 무엇입니까?” 우리 평범한 시민들도 자신과 어울리는 별칭을 갖고 인생을 품격있게 부르며 사는 멋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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