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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에 비친 화살 끝에 무엇인가 매여..."

[정현웅 역사소설] 종군위안부(63)- 출장군무<26>

  • 기사입력 2012.02.25 06:49
  • 기자명 정현웅
의식이 있는 상태였으나 마치 꿈 속에서 가위에 눌리면서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같은 느낌이었다. 꿈인지 생시인지조차 혼동이 왔다.죽음이 구체적으로 다가온 느낌이었다.먼저 떠오른 것은 고향에 있는 부모였고, 여동생 윤경이였다.

그리고 함께 잡혀온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옥경은 눈을 감았다. 눈이 제대로 감기지 않았다. 눈썹이 얼어서 서걱거리며 눈꺼풀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눈을 뜨고 죽어야 되는구나 생각하며 옥경은 앞을 보았다.

그녀의 시선에 한 개의 그림자가 잡혔다.움직이는 물체는 주위를 살피며 나무 그늘에서 그늘로 몸을 움직이다가 벼랑끝으로 갔다.벼랑 끝으로 갔을 때는 그 그림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그림자는 여진홍이었다.여진홍이 이 밤에 웬일일까.

중국인 위안부 여진홍은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추켜들었다.그것은 뜻밖에도 활이었다. 화살촉을 활시위에 끼고 벼랑 아래쪽을 겨누었다. 달빛에 비친 화살 끝에 무엇인가 매여 있었다. 종이를 말아서 맨 것 같았다.

여진홍은 벼랑 아래쪽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리고 재빨리 돌아섰다. 옥경은 온힘을 다하여 발로 바닥을 쳤다. 탁탁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움직이지 않던 다리가 움직였던 것이다. 재갈이 물려 소리를 지르지 못했기 때문에 옥경은 발로 신호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주위가 조용했기 때문에 발로 바위를 차는 소리가 여진홍의 귀에 들렸다.

여진홍이 움찔 놀라며 그늘에 숨었다. 그리고 옥경이 묶여 있는 소나무 쪽을 살폈다. 옥경은 몸을 휘저으며 사력을 다하여 발길질을 하였다. 버둥거리던 옥경을 살펴보던 여진홍이 가까이 다가왔다. 옥경과 여진홍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짧은 눈맞춤이었지만, 여진홍의 눈이 반짝 빛나며 많은 사연의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네가 나의 비밀을 목격했구나. 네가 보았듯이 나는 중국 팔로군 스파이로 잠입해서 일하고 있는 위장 위안부이다. 네가 그 비밀을 알았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 중국인 위안부 여진홍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나무 옆에 있는 돌을 집어들었다. 그것으로 옥경의 머리를 쳐서 죽일 것 같았다. 여진홍의 눈이 빛나면서 다가섰다. 그녀는 옥경의 옆으로 와서 돌을 높이 추켜들었다. 옥경이 고개를 젖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파르르 떨고 있는 옥경의 눈이 흥건하게 젖으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여진홍은 옥경의 속눈썹이 얼어서 하얗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몸은 얼어 있었다. 또다시 시선이 마주치자 여진홍은 돌을 내리치지 못했다. 그녀는 돌을 땅에 놓고 엎드려 울음을 터뜨렸다.

여진홍은 흐느껴 울면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몸을 일으켜 옥경의 몸에 묶은 줄을 풀기 시작했다. 묶은 줄의 매듭을 풀고 있다고 느끼자 옥경은 긴장이 풀려서 정신이 흐릿해졌다. 그녀는 그대로 쓰러졌다.

여진홍은 쓰러진 옥경을 반듯하게 눕혔다.그리고 입에 물려 있던 수건을 빼내었다.그녀의 몸을 간신히 안아서 옆의 빈터에 쌓여 있는 눈 위에 눕혔다.그녀의 종아리며 허벅다리 피부는 뻣뻣하게 얼어 있었다. 손으로 만지면 차가웠다. 눈 위에 눕혀 놓고 눈을 약간 덮었다.

그리고 눈으로 얼어 있는 허벅다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언 몸을 눈으로 마사지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문지르자 피부에 온기가 오르고 있었다. 여진홍은 몸에 땀을 내면서 옥경의 몸을 열심히 문질렀다. 한동안 문지르다가 그녀의 바지를 입혔다. 그리고 옥경을 업고 숲을 지나 병영으로 갔다.

위안부들이 있는 방은 병영 막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성곽 아래였다. 토담으로 만든 집이었는데 난로를 피워 추위를 막았다. 굴뚝에서 연기가 나오고, 장난을 하며 떠드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러 여자들이 모여 화투를 치고 있었다.

여진홍은 옥경을 그녀의 방에 뉘었다. 그리고 옷을 모두 벗기고 마사지를 계속하였다. 두 다리는 여전히 차갑게 얼어 있었다. 왼쪽 다리는 이미 부어 있었다. 깊은 동상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진홍은 그녀의 몸을 마사지하면서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곳에 묶여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어느 못된 군인의 짓이라고 생각되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전선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였다.

옥경의 몸을 계속 마사지하자 여자는 깨어날 듯 몸을 뒤척거렸다. 그리고 다리를 추켜들곤 하였다. 벼랑 위에 묶여 있을 때 다리로 바닥을 차며 운동하던 신경이 남아 그녀는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그 다리의 움직임은 무의식적인 것이며, 반사적인 동작으로 보였다.

난로에 불이 약해져서 여진홍은 밖으로 나가 장작을 가져다가 난로 안에 넣었다. 불을 피우자 방안은 훈훈해졌다. 옥경의 몸에 이불을 덮었다. 여진홍은 옥경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조금 전에 벼랑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순간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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