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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19회) 기마유목민들과 한민족의 연결고리

  • 기사입력 2021.02.15 23:33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지난 2500년간 동서 8,000km에 달하는 유라시아 대초원에서 맹활약 하면서 동부아시아에서부터 유럽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세계사를 써온 기마군단의 주인공들은 ‘흉노 - 선비 - 돌궐 - 몽골 - 여진’이다. 이들은 단지 한 시대만을 풍미했던 북방의 이민족 집단이 아니다. 짧게는 700여 년에서 길게는 1400여 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주인공들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해왔던 사람들이 세계 역사 속에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서구의 역사학자들의 무지와 중국 역사학자들의 역사 왜곡과 폄하 때문이었다. 이제 고대부터 한민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온 그들의 역사적인 실체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흉노

흉노는 기원전 3세기 후반에 몽골 고원을 통일한 기마유목민과 그들이 세운 제국의 이름이다. 그들은 연, 진, 한 시대에 중국을 끊임없이 침략했던 위협적인 존재였다. 중원을 최초로 통일한 진시황이 흉노 정벌에 나섰으나 지지부진하자 흉노의 침략을 제어하기 위해 몽염으로 하여금 만리장성을 쌓게 했다. 진에 이은 한나라의 고조 유방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를 치기 위해 나서나 백등산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흉노군에 포위당하고 만다. 결국 흉노 선우의 애첩에게 뇌물을 주고 포위망을 풀고 간신히 살아 돌아왔다. 한 고조는 흉노에 공주와 공물을 바치고 형제지국의 조약을 맺는 치욕을 당하고 흉노가 얼마나 두려웠던지 후손들에게 흉노와 다시는 전쟁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후 한나라의 7대 무제(BC 156~BC 87년) 때 이르러 흉노는 내분과 한나라의 공격으로 약화된다. 이후 동·서흉노로 분열되었다가 서흉노는 멸망하고 동흉노는 다시 북·남흉노로 분열된다. 남흉노는 중국에 동화되어 없어지고 북흉노는 북방 초원길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이후 약 200년간 역사에 남을 만한 큰 움직임이 없던 흉노는 AD350~360년경 다시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동쪽에서 온 아시아 기마군단이 볼가강, 돈강, 드네프르강을 건너 유럽을 파죽지세로 공략하면서 그 존재를 드러냈다. 유럽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훈 제국이 바로 그들이다. 5세기 중반 ‘아틸라’가 왕으로 등극하면서 훈 제국의 위세는 절정에 이르렀다. 동로마 제국을 제압하고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데 이어 서로마 제국과 갈리아를 공략하고 라인강을 건너 메츠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게르만 제후의 딸과 결혼한 아틸라가 첫날밤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면서 위기에 처했던 유럽의 운명에 대반전이 일어난다.

아틸라 사후 훈 제국은 내분으로 약화되고 얼마 못가서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흉노는 이렇게 약7 00년간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대제국의 흔적을 역사에 남겼다.

이렇게 북방사를 주도했던 흉노가 한민족 고대사와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점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흉노를 돌궐의 조상으로 보는 역사학자나 언어학자들의 연구가 있으며 터키인들도 흉노를 자기들의 선조로, 돌궐을 투르크라는 이름으로 건설한 투르크인의 최초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흉노는 당시 북방유목민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흉노’라는 나라는 있어도 특정 민족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대에 중국북방에서 활약하던 북방민족의 후예들은 후에 퉁구스, 몽골, 투르크어를 사용하는 민족으로 나누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중국의 역사·언어학자인 주학연 박사는 “흉노는 다혈연·다민족적인 부락연맹체”라 하고 “흉노족의 언어가 몽골어와 퉁구스어에 보다 가까우며, 이들의 지배집단의 혈연과 언어가 퉁구스적 요소를 보다 많이 내포하고 있었다....흉노의 지배집단은 퉁구스계 부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흉노의 언어가 단지 투르크어족만의 조상이라고 속단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오판일 수밖에 없다. 흉노족의 인종과 언어는 이미 후세 몽골족의 형태에 보다 근접해 있었다”라고 말했다.

둘째, 고대로부터 무덤 양식은 오랫동안 바뀌지 않는다 하는데 흉노의 무덤 양식은 적석목곽분으로 한반도 남부에서 나타나는 무덤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무덤 등에서 발굴된 유물에서 예사롭지 않게 유사한 특징이 나타난다. 기마유목민 고유의 금관을 비롯한 금문화, 동물문양 장식, 동복(청동솥) 등이 몽골 고원을 포함해 흉노가 활동했던 지역과 한반도에서 비슷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셋째, 흉노의 언어, 씨름, 의복 등 풍습, 순장하는 풍속이 한민족의 그것과 흡사한 부분이 많다. 흉노가 활약했던 북방 지역 일대로 연결되는 문화의 흐름이 나타나는 암각화를 비롯한 고대 유적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넷째, 통일신라를 완성한 30대 문무왕의 묘비이다. 682년 건립된 이 비석은 1796년경 경주에서 발견되어 청나라 유희해의 ‘해동금석원’에 탁본이 남아있고 서울대에도 탁본이 남아있으나 비석 자체는 한때 사라

져버렸다. 이후 1961년 경주 동부동 민가 근처에서 농부가 밭일을 하던 중 비석 하단부가 기적적으로 발견되어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그 비문에 의하면 신라 김씨 왕족은 투후秺侯의 후손이라 한다. 투후에 대해서는 기록이 상세히 남아있다. 《사기》에 의하면 지금의 중국 감숙성과 돈황 등 서역 지역을 지배하던 흉노의 휴도왕이 암살된 후 태자인 김일제金日磾등 일족은 한 무제에게 포로로 잡혀갔다. 김일제는 노예 신분으로 마부 생활을 하다 한나라 황실에 대한 역모가 일어나자 한 무제를 구하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이에 감읍한 무제는 투후秺侯라는 관작을 만들어 김일제에게 부여하고, 흉노인들이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을 보고 김金씨 성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해서 김일제는 최초의 김씨가 된 인물이다. 이후 투후 김일제는 수만 명의 흉노인들을 이끌고 산동의 하해현 지역에 땅을 받아 ‘투국’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갔다. 그런데 문무왕비는 신라 김씨 왕족이 바로 이 흉노인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비문에 나타나는 투후 김일제가 바로 신라왕가 김씨의 시조 김알지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하는 근거이다. 한편 《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의 저자 서동인은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과정에 김일제의 가문이 직접 연루되었고, 이후 왕망의 신新이 멸망하면서 이들이 후한의 압박을 피해 한반도로 이주하게 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흉노에는 선우가 직접 다스리는 중심부와 동·서부 지역을 다스리는 좌현왕·우현왕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고조선 등 한민족의 고대정권 구조와 유사하다. BC 174년 흉노의 영걸 묵특 선우는 돈황 넘어 서역을 정벌하고 실크로드를 장악한 후, 우현왕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BC 121년 흉노의 우현왕(휴저왕) 사후 태자 김씨 형제(김일제, 김륜)가 중국으로 들어와 한 왕실에서 활약했고, 전한 멸망 후 세운 것이 신나라다(왕망은 원래 김망이라 한다).

이들 후예가 김해와 경주 일대에 들어와 신라·가야를 형성했다. 따라서 한국과 중국의 모든 김씨는 흉노인이며 김해 가야는 흉노인 김씨의 나라였다. 또한 신라로 진출한 것은 김씨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다섯째,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 윤치도의 《민족정사》, 행촌이암의 《단군세기》 등에서는 앞서 기술한 대로 흉노가 고조선의 일부였다고 하면서 흉노와 한민족의 관계를 설파하고 있다. “(고)조선은 흉노의 왼팔”이라는 사마천의 《사기》 등 사서들의 기록 또한 이러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2. 선비

흉노가 서쪽으로 이동하자 기마군단의 요람인 몽골 고원을 차지한 것은 선비족이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흉노를 오랑캐라 하여 ‘호胡’라 불렀고 그 동쪽의 오랑캐를 ‘동호東胡’라 불렀다. 동호가 흉노의 공격으로 쇠락하면서 오환과 선비로 나눠진 후 선비는 선비산(대싱안링 산)과 시라무룬강 유역에서 목축과 수렵 생활을 해왔다. 선비족에서 단석괴라는 영걸이 나타나 한과 연합하여 흉노가 분열한 후 몽골 고원에 남은 북흉노를 축출하고 AD 156년 몽골 고원에 선비 제국을 건설했다. 단석괴 사후 가비능軻比能이 이어받았으나 위魏의 자객에 암살된 후 선비는 분열되어 내몽골에서 할거하게 된다. 이후 선비의 후예 중 탁발, 모용, 우문, 단 등의 지파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데 탁발부는 북위(386~534년)를 건국하여 남북조 시대를 열고 모용부는 연나라(337~409년)를, 우문부는 거란(후에 요나라, 916~1125년)을 세웠다. 요 멸망 후에는 중앙아시아에서 동·서투르키스탄 전역을 지배했던 서요(카라 키타이, 1132~1218년)로 이어졌다. 이렇

게 선비는 1000년 이상 몽골 고원, 만주 지역,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세력권을 형성했다.

선비는 흉노에 비해 한민족과 더 깊은 역사적 관계를 갖고 있다.

첫째, 고조선 후예는 동호, 예맥, 숙신으로 분파되었다고 봐야 하며 동호는 오환, 선비로 다시 나뉘었다. 선비의 후예가 북위, 연나라, 거란(요나라)을 건설하였으며 거란은 자신들이 고조선의 옛땅에서 유래했다 하며 고조선의 여러 전통을 유지했다. 선비족의 군장은 단檀씨다. 박달나무 ‘단’자는 단군의 ‘단’자이다. 선비가 고조선의 후예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둘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고조선이 기원전 4세기경 삼조선(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으로 분립되었는데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조선’만을 조선이라 쓰고 ‘신조선’은 ‘동호’라 칭하여 <흉노전>에 넣었다”라고 밝혔다. 즉, 중국 사가들이 고조선 중심부를 동호라고 했고 동호의 후예가 선비이므로 선비가 고조선 후예라는 결론이 나온다.

셋째, 동양대 김운회 교수는 거란의 원류인 동호의 영역이 고조선과 일치하며 예맥, 동호, 숙신은 구별이 안 된다고 하면서 동호, 숙신, 말갈,물길, 거란, 선비 등은 예맥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 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역시 선비가 고조선의 후예란 의미이다.

넷째, 선비족이 발원하고 활동했던 지역의 무덤에서 발굴된 유물 또한 한반도 남부 지역인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흡사하다는 점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3. 돌궐

흉노의 뒤를 이었던 선비 제국과 선비의 후예가 세운 유연(330~555년)이 멸망하자 돌궐이 몽골 고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552년 영걸, 부민 카간이 나타나 유라시아 대초원 동서와 남북 일대를 차지한 돌궐 제국을 세웠다. 당시 돌궐이 차지한 영역이 1,000만 km2에 달했다. 582년에는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 두 지역을 분할해 동·서돌궐로 분열되었다가 659년경 당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영웅 쿠틀룩의 지휘하에 30년 가까운 독립전쟁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여 종래의 돌궐 영토를 거의 회복하는 기적을 이뤘다. 돌궐은 이후 745년 위구르, 당, 티베트 연합 세력에 멸망했다. 그러나 돌궐 멸망 후 투르크인들은 서진을 계속하면서 중앙아시아와 아랍 등지에서 수많은 나라를 세웠다. 카를룩, 셀주크, 호라즘,카라한, 가즈나, 맘루크, 악 코윤루, 카라 코윤루, 오스만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 시대에 서진하던 투르크인들은 대거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이슬람을 수용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주요 원인이었다. 어찌됐든 투르크인들은 이슬람 세계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한편 8세기경에는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당나라가 실크로드를 장악하려 서진하면서 두 세력이 충돌하게 됐다. 751년 이슬람 연합군과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의 7만 대군이 탈라스 강가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의 동맹군인 카를룩군이 배신하여 고선지 부대는 패하였고 그 결과 중앙아시아 일대가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가게 됐다.

투르크인들은 약 1400년에 걸쳐 그 세력을 이어왔는데 그들이 세운국가 중 당대의 대제국으로 대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들 수 있다. AD 960년경에는 셀주크 베이가 지휘하는 투르크 세력이 실크로드를 따라 사마르칸트, 부하라로 이주하였고 1037년 토그릴이 대셀주크 제국을 출범시켰다. 이들 중 술레이만샤가 일부 세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소아시아 셀주크’를 건국했다(1078년). 이후 셀주크 제국이 서진하면서 기독교 성지를 모두 차지해 버리자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충돌하는 십자군 전쟁이 일어난다. 1194년 셀주크 제국 멸망 후에는 투르크인들이 또 다른 대제국 오스만 제국을 이어갔다. 1299년 오스만 1세가 세운 오스만 공국에서 출발하여 오스만 제국은 중동, 우크라이나, 북아프리카, 중·남부 유럽 등지를 지배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1923년 터키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돌궐은 흉노와 선비에 이어 몽골 고원을 차지하여 유라시아 초원에서 대제국을 건설했고 유럽까지 이동하면서 1400년 가까이 역사를 이어 갔다. 돌궐 또한 한민족 고대사와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갖고 있다. 그 단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 사가들은 돌궐이 흉노의 별종, 즉 흉노의 후예라 했고 터키인들은 자기들의 선조는 흉노이며 그 후예가 돌궐 제국을 세웠고, 그들이 서진하여 오늘날의 터키의 모체가 되었다고 한다. 앞서 흉노와 고조선의 관계를 보면 돌궐과 한민족의 연결고리도 추정이 가능하다 하겠다.

둘째, 돌궐족의 유래에 대해서 《수서隋書》 〈돌궐전〉은 “돌궐의 선조는 평랑 일대의 잡호였는데 성은 아사나阿史那 씨였다. 후에 북위의 태무제가 저거 씨를 멸망시키자, 아사나는 500호를 이끌고 여여로 도주하여 대대로 금산에 살면서 쇠를 벼리는 일에 능하였다. 금산은 형상이 투구처럼 생겼는데, 민간에서는 투구를 ‘돌궐’이라 했기 때문에, 이를 족명으로 삼았다”라고 썼다. 아사나 씨는 돌궐의 지배 집단인데 중국 학자 주학연박사는 “아사나는 애신 또는 오손의 발음이 변형된 경우로 저거에서 유래했으니, 여진족인 김씨 씨족의 일파라고 할 수 있겠다”라고 말했다 .

셋째, 돌궐은 당과는 적대 관계였으나 고구려와는 우호·동맹 관계였다. 고구려를 이은 발해 역시 돌궐과는 우호 관계였다. 《구당서》 <북적열전北狄列傳>은 대조영이 동문산에서 세력을 모아 진국왕振國王에 올랐고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통교通交하였다고 쓰고 있다.

넷째, 이후 서진한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성립하면서 투르크의 지배 집단이 아사나 씨에서 오구즈 씨로 바뀌게 된다. 프랑스 파리 4대학의 발레리 베린스탱 교수는 저서에서 오구즈 후예의 나라에 대해 다

음과 같이 설명한다. “10세기에 바그다드의 칼리프가 약화되자, 중앙아시아의 많은 투르크족이 독립을 쟁취하여 국가를 세웠다. … 그러나 점차로 투르크족은 몽골족에게 쫓겨 이란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11세기에 오구즈족은 셀주크 왕조를 낳았고, 13세기에 오구즈족의 일원인 오스만은 소아시아에 오스만 왕조를 세웠다. 그리고 나머지는 인도로 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오구즈 씨는 고구려 왕가 가문의 후예이다.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는 오구즈 가문의 시조 오구즈칸은 고주몽의 후예란 것을 사서를 통해 밝히고 있다. 돌궐 후예인 투르크가 서진하면서 고구

려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중앙아시아 등지에서 여러 나라를 건설하였던 것이다.

4. 몽골

돌궐이 서쪽으로 떠난 후 몽골 고원에는 새로운 세력이 자리를 잡게 된다. 10~12세기 즈음에는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 타타르 등의 유력한 기존의 부족이 몽골 고원을 분할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바로 몽골족이다. 세기의 영웅을 훌쩍 뛰어넘어 천년의 영웅 밀레니엄맨이라 칭해지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부족을 통합했다. 그리고 1206년 대몽골 제국을 출범시키면서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칭기즈칸은 기마군단의 기동력, 복합곡궁과 삼각철 화살 등 강력한 전투 무기, 10진법의 능력 중심의 중앙집권적 조직과 군율, 파발마·역참·상인 정보망을 활용한 정보 네트워크, 자유자재로 전개되는 위장·매복·후퇴·반격의 전술, 전공에 따라 전리품을 분배하는 공평한 상벌제 등으로 인류사 최강의 기마군단을 등장시켰다. 몽골 제국은 동아시아의 화북, 금, 서하, 남송을 정복하고 중앙아시아에서는 호라즘 등 기라성 같은 투르크 국가들, 서아시아에서는 이슬람 세계를 정복했고 유럽에서는 러시아·헝가리·폴란드를 정복하는 등 세계 문명권의 80%를 지배했다. 대몽골 제국은 인류 역사상 유일한 세계 제국을 건설했고 세계화를 달성했다.

칭기즈칸의 대몽골 제국은 후손에 의해 원나라,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 킵차크 칸국으로 승계되었다. 이 중 중국 일대를 지배한 원나라는 1368년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지만 중앙아시아와 인도 대륙에서 그들의

역사는 지속된다. 차가타이 칸국 멸망 후 칭기즈칸의 후손 티무르가 중앙아시아 일대에서 티무르 제국(1370~1526)을 세웠고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는 인도에서 무굴 제국(1526~1857)을 세워 1857년까지 존속했다. 칭기즈칸 때부터 약 700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몽골 제국이 이어졌다.

다음의 대몽골 제국과 한민족의 관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를 보면 그야말로 놀라운 대목들이 나타난다.

첫째, 대몽골 제국을 건설하고 지구를 하나의 세계로 만든 인물 칭기즈칸이 어디에서 왔는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몽골 부락은 칭기즈칸 이전부터 당연히 존재했겠지만 칭기즈칸 시대 이전까지는 북방에서

이름 없이 조용히 있던 작은 민족이었다. 몽골은 원래 선비의 일파인 실위계의 작은 부락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사서에 등장하는 몽골족은 《구당서舊唐書》에 몽올실위蒙兀室韋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며 이후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몽와蒙瓦, 《요사遼史》에서는 맹고盟古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학자 주학연 박사는 몽골족의 퉁구스 혈연에 주목하고 몽골족과 퉁구스계 민족이 보다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 거란어가 몽골어와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요사》가 기록하고 있는 거란의 옛 여덟 부락 중 ‘실만단悉万丹(또는 심말단)’이 몽골 부락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고대의 동호는 거대한 집단이었으며 동시에 몽골계 민족의 주요한 직계조상이기도 하였다”고 결론지었다. 이러한 내용은 고조선 - 동호 - 선비 - 거란 - 몽골의 관계가 이어진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둘째, 동양대 김운회 교수는 세계적인 몽골인 학자 한촐라 교수가 한국에 도착하자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라고 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며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몽골의 시조신인 알랑 - 고아의 아버지가 고주몽이기 때문이다. 일찍 과부가 된 알랑 - 고아의 삶은 참으로 고달팠으며 칭기즈칸의 어머니도 알랑 - 고아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칭기즈칸을 정신적 지주로 삼는 몽골에게는 칭기즈칸의 어머니가 바로 알랑 - 고아이며 민족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나라가 한국일 수밖에. 한국은 바로 고주몽의 나라이니까. ”또 두 민족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몽골은 또 다른 한국이고 한국은 또다른 몽골이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알려진 바이칼의 부리야트족들은 바이칼 일대를 코리(고구려족 또는 구리족 또는 고리국의 구성원)족의 발원지로 보고 있으며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믿고 있다.”(고주몽 - 알랑고와 - 칭기즈칸의 구체적 관계는 다음 장에서 소개하도록 하겠다.)

셋째, 몽골 전문가인 박원길 교수에 따르면, 몽골과 고구려는 형제 관계였다고 한다. “멀리 대싱안링大興安嶺 남단에서 발원하는 할흐 강이 보이르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할힌골솜’이라는 곳이 있고 여기에는 석상石像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꼬우리(꾸리 : Khori - 고구려, 고리, 구리)’족의 조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석상을 중심으로 서쪽은 몽골이 살고 있고 동쪽은 코리족이 살았다고 하는데 이들은 서로 통혼通婚하며 같은 풍습과 민족 설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넷째, 몽골인들은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인 ‘솔롱고스’라 한다. 몽골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몽골은 외모, 언어, 풍습, 인종 등에서 한국과 너무나 흡사한 점이 많다.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무지개 색깔의 색동옷, 씨름, 서낭당, 귀신 쫓는 나무인 복숭아 나무는 불태우지 않는 관습, 백색 숭상, 비석치기, 윷놀이, 엄마 뱃속부터 나이를 세는 관습(한국 나이처럼) 등등이다.

다섯째, 몽골 제국군이 세계를 정복할 당시에 상상을 초월하는 전투력으로 거대 국가인 남송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의 나라를 최단 시간에 정복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고려는 당시 여몽 전쟁

을 장장 39년간 치렀다. 물론 당시 고려는 강력한 기병과 해군을 보유하는 국가였으나 세계를 제패한 대몽골 제국을 이길 수 없는 상황임이 명백한데도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끝까지 저항했다. 당시 몽골군에 저항했던 모든 나라들은 처참한 보복을 당했고 대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고려의 경우 전쟁 후에도 형제지국兄弟之國이라 하여 사실상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하게 했고 원나라 공주를 고려왕에게 왕비로 시집보내고 이후에도 곡식 등 수많은 공물을 보냈다. 이렇게 전쟁에 이긴 나라, 특히 세계 제국 원나라가 고려에 대해 유례없는 대우를 했고, 특히 고려왕은 원나라 전체 종실 서열의 4~7위에 해당하는 정도였다 한다. 고려 - 몽골의 관계는 한마디로 특수했다고 밖에 설명이 안 된다.

여섯째,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분석에 의하면 칭기즈칸은 발해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이자 발해 제2 왕가를 이루게 되는 대야발의 후손이다. 또 고려의 건국자 왕건 역시 발해 왕가의 사위이다. 그래서 고려 건국자 왕건은 ‘발해는 내 친척’이라 했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요)과는 통교하지 않았다. 거란이 보낸 사신은 귀양 보내고 공물로 보낸 낙타는 만부교에 묶어 굶겨 죽게 했다. 만부교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또 거란과는 통교하지 말 것을 유언과 훈요십조에 남겼다. 고려와 몽골의 관계를 다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후에 상세히 기술하겠지만 고려와 몽골 왕가가 족보로 연결된다는 얘기다.

5. 여진

여진은 중국인들이 발해가 멸망 후 발해 땅에 붙인 이름이다. 이들은 시대에 따라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이라 불렸으며 청대에 이르러서는 그들 스스로 만주족이라 불렀다. 여진은 중국 기준에서는 북방 오랑캐 민족에게 붙여준 이름일 따름이다. 고구려는 당나라 시대에 고구려와 돌궐이 당을 견제했다. 그런데 돌궐이 멸망하자(659년) 이어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다(668년). 돌궐이 독립전쟁 끝에 다시 (후)돌궐을 건국하자(682년) 고구려 역시 멸망 후 30년 만인 698년에 발해를 건국했다. 그런데 128년간 지속된 발해가 926년에 멸망하자 중국인들은 발해 옛 땅을 여진,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을 여진족이라 불렀다.이것이 여진과 여진족의 실체다.

여진족의 여러 부락 중 함흥, 길주이북에 있던 완안부의 지도자 아골타가 등장하여 흑수말갈까지 통합하여 금나라를 건국했다. 금은 송과 연합하여 거란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이어 송을 강남으로 쫓아내버리고 수도를 상경(하얼빈)에서 연경(베이징)으로 천도했다. 이때 베이징은 처음 왕조의 수도가 된다. 금은 1234년 승승장구하는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패배하여 멸망에 이른다. 한편, 1616년 여진부족을 통합한 누르하치는 금나라에 이어 후금後金을 건국한다. 이어 즉위한 청 태종(홍타이지)은 대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순치제는 중국 지배의 기초를 확립하고 강희제는 중국 영토 전체를 통일한다. 이어 등장한 옹정제 때 청나라의 지배체제가 확립되고 건륭제 때는 최대 영토를 지배하게 된다. 청은 1912년 마지막 황제 선통제에까지 지속된다.

청나라로 근세사까지 우리와 연결되었던 여진의 역사 또한 한민족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를 뒷받침하는 내용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금나라 역사서인 《금사》는 금나라 건국자 아골타의 조상이자 금국시조인 함보가 고려에서 왔다(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발해를 의미)라고 하며 아골타는 스스로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집안”이라 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쓰여진 《만주원류고》에서 건륭제는 ‘청태조 누르하치愛新覺羅 가문이 금나라 남은 부락이며 발해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있다.

셋째, 북한의 사회과학원의 리지린은 “중국의 고대문헌에 보이는 ‘숙신’은 곧 고조선을 말하는 것이라고 추단한다. 정약용도 일찍이 고대 ‘숙신’을 ‘조선’이라고 인정하였다”라고 한다.

넷째,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에 따르면 아골타는 발해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후손인 함보의 7대손이며 누르하치는 아골타의 약 20대손이라 한다. 여진족은 고구려·발해의 후예이며 금의 건국자 아골타, 청의 건국자 누르하치 모두 고구려 후예인 발해인의 후손인 것이다.

이와 같이 지난 2500년간 기마군단으로 활약하면서 세계사를 써온 흉노, 선비, 돌궐, 몽골, 여진의 5개 북방 기마민족이 우리 한민족의 역사와 결코 무관하지 않고 한민족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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