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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15회) 여진인들이 세운 제국

  • 기사입력 2021.01.10 23:17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1. 고구려, 발해를 계승한 여진이 만주에서 일으킨 ‘금’

여진의 나라 금의 기원과 흥망

여진족은 만주에 살던 퉁구스계 민족을 지칭한다. 중국 사가들은 이들의이름을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춘추전국 시대에는 숙신肅愼14, 한나라 때는 읍루挹婁15,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勿吉, 수·당대에는 말갈靺鞨,송·명대에는 여진女眞, 청대에는 만주족이라고 이름 지었다.

6세기 말 수·당 시대에 광범위한 만주 지역의 말갈은 속말·백산·백돌·불열·호실·흑수·안차골 등 크게 7부족으로 나뉘어 살았으며, 흑수부족을 제외한 6부족은 발해 건국 시에 합류했고, 흑수부족은 발해북부 지역에서 발해에 대항하다 발해 무왕 시대에 복속했다. 중국 사가들은 대체로 이처럼 만주 지역에 살던 이민족을 926년 발해 멸망 후를기준으로 해당 지역은 여진으로, 살던 사람은 여진족이라고 불렀다.

여진은 발해가 멸망한 10세기 초 이후 요나라遼(거란)의 지배를 받았다. 요의 호적에 편입된 요양 일대(랴오닝성) 부족은 숙여진, 편입되지 않은 송화강 이북(헤이룽장성) 및 두만강 유역(지린성) 부족은 생여진이라 불렸다. 이 시기 200년간 여진은 역사에서 눈에 띄지 않았으나, 12세기 초 만주 하얼빈 남동쪽의 생여진 완안부의 세력이 커지고, 영걸 아골타阿骨打가 흑수말갈을 통합하고, 1115년 상경회령부에서 금나라金를 건국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금 태조 아골타는 요를 공격하여 영토를 넓히고 1120년 송宋과 동맹을 맺은 후 만주에서 요를 쫓아내고 북경까지 진출했다. 1125년 2대 태종 때 마침내 요를 멸망시켰다.

금은 요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동맹국이었던 송과 마찰이 일어나자 1127년 송의 수도 카이펑開封(개봉)을 공격하여 황제를 사로잡고 송을 강남으로 몰아냈다. 이로써 금은 만주·내몽골·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고, 해릉왕은 1153년 상경회령부에서 연경(오늘날 북경)으로 천도하여 중국 중심부를 장악하고 여진인들을 이주시켰다. 남쪽으로 간 송은 이후 남송으로 이어지면서 금의 신하국이 됐다. 해릉왕을 쫓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종은 거란의 반란을 진압하고 남송과 국교를 회복한 후 내정을 개혁해 금나라 최고의 명군이 됐다. 12세기 말 전성기를 구가하던 금은 남송·서하·몽골 등의 공격에 시달리다가 1214년 수도를 카이펑으로 옮겼다. 그러나 1234년 몽골과 남송 연합군에 의해 아골타 이후 10대를 이어오다 120년 만에 멸망했다.

금나라 시대 동아시아 국제 정세의 흐름

금은 발해 멸망(926년) 후 약 90년이 지난 1115년 발해 영역에서 건국해 120년간 존속했다. 당시 중국 본토에는 송(960~1126년)과 남송(1126~1279년)이, 만주와 몽골, 화북 지방에는 요(916~1125년)가, 한반도에는 고려(918~1392년)가 각각 세워졌다. 이 시기 돌궐(투르크)은 위구르에 멸망한 후 서진하여 셀주크 제국을 건국했다(1037~1194년).

① 여진과 거란의 관계

기본적으로 여진金과 거란遼은 대적 관계이다. 선비의 후예인 거란족이 세운 나라인 요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 발해 지역에 있던 여진은 여러부로 나뉘어졌지만, 대체로 거란과 속국 관계에 있어 거란의 착취와 여진의 반발이 이어졌다. 아골타는 금을 건국한 후 요에 수교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하자 만주 각지에서 요를 격파했다. 이때 송과 금은 요나라 협공을 위한 조약을 맺었다. 금은 요를 파죽지세로 공격하여 상경·중경·서경을 함락하고 수도 연경에 입성(1122년)한 후 1125년 부패로 국력이 쇠잔한 요를 멸망시켰다.

② 여진과 송의 관계

송宋은 거란과 대치하면서도 여진과 바다를 통해 교역을 지속했으나 여진을 큰 세력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아골타 등장 이후 강성해진 금이 요를 격파하고 만주를 장악하자 송은 과거 거란에 빼앗긴 연운 16주를 수복하기 위해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을 들고 나왔다. 금과 송이 연합하여 요를 친 후, 금은 장성長成 이북의 중경을 차지하고 송은 장성 이남의 남경을 차지하기로 한 것이다. 금은 대군을 동원하여 요를 전면 공격했으나 송은 출병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에 금 태조는 대규모 배상을 받아냈을 뿐 아니라 남진정책의 빌미를 얻게 됐다.

1125년 금은 송을 공격했다. 송은 나약하게 대항하다 모든 방어 기회를 놓치고 1127년 왕실이 포로가 되면서 멸망했다(정강의 변). 그러나 휘종의 아홉째 아들이 살아남아 남경에 도읍하여 이후 남송으로 이어졌다. 남송 시대에도 양국의 전쟁은 지속됐다. 남송은 금이 가장 두려워하는 걸출한 장군 악비岳飛를 모함 끝에 처형하는 등 국력을 낭비한 끝에 1141년 금과 화의하고 종속하는 국가로 전락했다.

③ 여진과 고려의 관계

당초 여진은 고려와 거란에 귀속하였으나 복속과 배반을 되풀이했다.고려와 여진은 두만 강변 등 국경 지대에서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이에 윤관은 금 건국 이전인 1107년 침입하는 여진을 정벌하고 천리장성 9성을 쌓았다. 금이 건국된 후 요가 멸망하고 금이 만주를 차지한 후에는 금과 고려 사이에 긴장과 마찰이 생겼다. 그러나 금은 적대 관계인 거란은 정복했지만 고려에 대해서는 회유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금과 고려는 전형적인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서경천도 운동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의 관군에 진압된 이후 금과는 큰 전쟁 없이 사대 관계를 지속했다.

④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한민족의 관계

고조선 이래 만주에 거주하는 다수 주민은 조선민족이었다. 부여, 고구려도 그러하며 발해 역시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누구나 이들 역사를 우리 역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발해가 멸망한 이후가 문제다. 발해 멸망 후 그 지역과 사람들은 여진(족)으로 불렸으며, 여진인들이 금을 세웠

다.

그러면 금나라 역사는 누구의 역사인가? 1900년대 들어서까지도 금나라 역사를 우리 역사에서 다루었다. 《신단민사》16에서는 발해·요·금·청까지 포함해 민족사의 흐름을 밝히고 있고, 《배달조선정사》17에서도 요사遼史·금사金史·청사淸史를 한국사에 포함시켰다. 《민족정사》18에서는 제6장 남북조시대사의 제1절 북조사北朝史에서 발해사·요조약사遼朝略史·청조약사淸朝略史를, 제2절 남조사南朝史에서 고려·조선사를 다루고 있다. 《조선유기》19·《조선사》20 및 《조선역사》22에 서는 조선역대전수도(朝鮮歷代傳受圖)에서 고조선으로부터 한韓(마한·진한·변한 → 백제·신라·가야 → 신라·고려·조선), 부여夫餘(북부여·동부여·북옥저·동옥저 → 고구려·발해), 숙신肅愼(읍루 - 물갈 - 말갈, 여진 → 금·청)으로 나누어진 것으로 쓰고 있다. 여진과 한민족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목할 만할 기록이 있다. 《금사金史》는 “아골타가 여진과 발해는 본래 한 집안이라고 했다”라고 썼다.

이 내용은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의 왕가가 발해의 대조영 - 대야발 가계가 같다는 의미이다. 또 금나라의 기원과 관련하여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로 고려에서 왔다”라고 했다. 《금지金志》, 《대금국지大金國志》, 《삼조북맹회편三朝北盟會編》 등은 초기 여진 추장이 신라인이라 밝히고 있다.

《흠정만주원류고》에서는 금나라 시조는 합부(함보)인데 고려에서 왔으며, 금의 국호가 신라 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고려사》에는 “아골타의 시조가 고려에서 나왔다”라고 쓰여 있다. 종합하면 금 시조가 신라인, 고려인 또는 여진이라 불린 발해계 인물이란 말이다. 여기에서 고려에서 왔다는 ‘함보’라는 인물에 대한 북방사학자 전원철 박사의 연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려진 대로 함보는 ‘아골타’의 7대조이다. 함보의 선대는 ‘금행’이며, 그에게는 ‘아고래’, ‘함보’, ‘보활리’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금행은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4대조이다. 그래서 아골타는 대야발의 12대손이 된다. 대조영과 대야발은 고구려 왕족으로 주몽의 후예이므로, 결국 아골타는 고구려 가문의 후손이 된다. 이로써 《금사》를 비롯한 여러 사서의 기록이 이해가 된다.

여진인들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기원에 대한 기록은 별로 없으나, 고구려·발해 등 한민족 국가의 구성원이었으므로 우리와는 형제민족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668년)후 고구려 유민이 건설(698년)한 나라이고, 신라 멸망(935년) 후에는 신라 유민들도 옛 발해 영역으로 다수 이주하였으며, 이들의 후예가 세운 나라가 금이다. 금은 송과는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으나 고려와는 대체로 큰 전쟁 없이 형제국가로 지냈다. 여진은 금 건국 전에는 고려를 부모나 형으로 여겼고, 금 건국 후에는 스스로 형이라 칭했다. 고려는 물론 조선 시대도 많은 여진인이 귀화했고 통혼도 했다. 이는 서로 남이 아니라는 역사적 인식을 공유했기 때문이 아닐까.

여진은 만주에서 일어나 걸출한 지도자의 등장과 더불어 단기간 내에 대통합국가를 건설했고, 중원까지 제압하면서 동북아의 패자가 되었다. 현대의 기적을 일구어낸 한민족의 성장 DNA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 여진사女眞史라고 하겠다.

▲ 청나라 발상지 허투일라 성터(무순시 신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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