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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관리한 사찰 ‘강화전등사’2

문화재 :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약사전(보물 제179호), 전등사 철종(보물 제393호)

  • 기사입력 2020.11.08 21:52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가

 

▲ 전등사 대웅보전

 

전등사 대웅보전의 공포는 외2출목, 내4출목 형식이다. 첨차는 하부를 둥글게 깎아 낸 교두형 첨차를 사용하였다. 초제공과 2제공살미는 앙서형이나, 3제공은 수서형으로 익공의 모습을 하고 있다. 4운공은 당초문을 초각하였는데 주상포에서는 용머리(龍頭)로 장식하였다. 제공은 불전 내부에서 일체형으로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다. 가구 구조는 내부에 기둥이 없는 5량 구조이다. 천장은 내목도리를 경계로 안쪽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으나 층을 나누었으며 바깥쪽은 빗천장으로 마감했다.

 

정면의 각 칸에는 빗살2단청판삼분합문을 달았고, 측면의 동쪽 편에는 빗살2단청판문을 달았다. 건물 뒤편의 동쪽 칸에는 회벽을 하였고 가운데 칸은 빗살2단청판문을 두 짝을 달았으며 서쪽 칸은 반자널문을 달았다. 또한 건물의 서쪽 편에는 동쪽 편과 같이 빗살2단청판문을 달았다.

 

▲ 석가여래삼존불과 수미단 

 

석가여래 삼존불(보물 제1785호)은 조각이 화려한 수미단 위에 모셨으며 그 위에는 정(丁)자 모양의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건물 내부는 용과 극락조, 물고기 등의 조각물로 장식하고 단청을 화려하게 꾸몄다. 보이지 않는 깨달음의 가르침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곳 번뇌의 불길이 완전히 소멸한 열만의 집, 깨달음 성취한 부처님이 무한한 고요 속에 법열(法悅)을 음미하는 곳이 닫집이다. 이곳의 닫집은 다포의 포작을 쌓아 올려 만든 보궁형으로 닫집을 지키는 용의 모양이 익살스럽다.

 

수미단(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8호)은 대웅전 내의 천개와 더불어 장엄한 불교 세계를 아름답게 묘사했다. 이곳 수미단은 가로 480cm, 세로 118cm, 폭 200cm의 규모이다. 수미단의 하단 받침부 몰딩 사이에는 불법의 수호격인 도깨비와 같은 문양이 익살스럽게 조각되어 있다. 중간 부분 장판에는 꽃, 나무, 새, 당초문, 보상화문, 상상의 동물 등이 화려하게 돋을새김했다.

 

대웅보전 내에는 조선 중종 39년(1544)에 제작된 법화경판(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544호)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이 경판은 조선 시대에 가장 많이 읽힌 부처님 말씀이다. 본래는 105매였는데 1매는 한국전쟁 와중에 없어졌다고 한다.

▲ 경업대  

  

또한 불단에 업경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7호)가 놓여 있다. 이 업경대는 지옥의 염라대왕이 가진 죽은 사람의 죄업을 드러내 보인다는 거울로 ‘업경륜’이라고도 한다. 금속으로 만든 이 업경대는 황색 사자와 청색 사자 1쌍이 나무로 조각한 몸체와 등 위에 커다란 화염문 거울이 꽂혀있다. 높이는 107cm, 길이 65cm이다. 좌대 바닥에 ‘天啓七年丁卯九月十三日刻祿木畵員密英天琦奉生’이라는 묵서 명문이 남아있어 조선 인조 5년(1627)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청동수조 

 

대웅보전 마당에는 지금이 112cm, 높이 72cm의 큰 청동 솥이 고려말~조선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으로 제작된 이 수조는 바리[鉢] 형태를 띠고 있고, 주둥이에는 덧띠를 두르고 있다. 약간의 균열과 파손 흔적이 보이지만 모두 수리하여 양호한 상태이다.

▲ 약사전  

 

대웅보전 우측에는 장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겹처마 팔작붕의 건물인 약사전(보물 제179호)이 있다.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웅보전과 같은 양식의 건물로 보아 같은 시기에 중건된 것이 아닌가 추정하고 있다. <대웅보전약사전개와중수기>에 의하면 1876년(고종 13)에 중수하고 기와를 바꾸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막돌을 사용하여 허튼층을 쌓은 기단을 두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초석은 대웅보전과 같이 자연석을 다듬어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미미한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외1출목 내2출목 형식을 취했고, 초제공은 앙서형이고, 2제공은 익공형, 3제공은 운공형으로 짜 맞추었다. 주상포와 주간포는 건물 밖은 갖으나 내부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하였는데, 주상포는 제공을 일체형이지만, 주간포는 제공을 조각하지 않고 교두형으로 처리하였다. 천장은 중도리를 경계로 하여 안쪽은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바깥쪽은 빗반자로 처리하였다. 건물 정면 3칸에는 빗살2단청판문을 각각 두 짝씩 달았다.

▲ 석조전 석가여래좌상  

 

내부에는 고려 후기 또는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석조여래좌상(인천 유형문화재 제57호)이 봉안되어 있다. 머리가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익 어깨가 넓은 각진 신체, 간략한 옷 주름을 표현하였다. 육계는 높이 솟아 있고 나발을 새겼다. 눈은 작으며 수평에 가깝고, 코는 원통형이고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어깨에는 통견으로 걸쳤고, 옷 주름은 대칭적으로 단순하게 표현하였다. 대의 자락이 가슴 밑까지 ⨆모양으로 늘어져 있고, 젖꼭지가 작게 도드라져 있다. 두 손은 결가부좌 한 다리 위에 손바닥을 위로하고, 왼손 위에 오른손을 포갠 다음 중지를 구부려 맞대고 엄지의 끝과 닿게 한 상품중생의 아미타 수인을 취하고 있다

 

▲ 명부전  

 

약사전 서쪽에는 명부전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 내에는 목조지반보설삼종상 및 시왕사, 권속상(보물 제1786호)이 봉안된 곳이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은 전등사시왕조상회향발원문에 의하면 1636년이 조각승 수연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 좌우에 무독귀왕, 도명존자, 시왕(十王)과 귀왕, 판관, 사자상, 동자상, 인왕상 등 16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제작됐다.

▲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지장시왕상 등

 

목조지장보살상은 방형의 얼굴에 엄중하고 자비로운 상호(相好)를 보이며 양 어깨에 걸친 대의 옷자락은 유연한 주름을 이루며 하체로 연결된다. 양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취한다. 도명존자상은 얼굴표현에서 사실성이 돋보이며, 장삼위에 가사를 입은 착의형식이 단정하다. 목조지장보살삼존상을 중심으로 시왕상 10구가 좌우로 배치되어 있고 그 옆으로 귀왕 1구, 판관 4구, 사자 2구, 인왕 2구가 대칭적으로 서 있다. 동자는 시왕의 앞면에 놓여 있다. 지장보살상의 좌우에 석장을 든 도명존자와 원통형 합을 받쳐 든 무독귀왕이 서 있고, 좌측에는 1·3·5·7·9대왕, 우측에는 2·4·6·8·10대왕이 의자 위에 앉아 있다. 지장시왕과 귀왕, 판관, 사자, 인왕 등의 권속들까지 봉안하여 군집을 이루는 명부전 지장시왕상 도상은 17세기에 유행했던 전형적인 모습이다.

 

▲ 철제종 

 

명부전 앞에는 제작 년대를 알 수 없는 북송시대의 철제종(보물 제393호)이 자리한다. 종각 내에 자리 잡은 철제종의 용뉴부에는 좌우 쌍룡이 한 몸으로 등을 지고 웅크려서 고리를 이룰 뿐 우리나라 범종과 같은 용통은 없다. 용뉴 주위에는 연꽃잎 복본 16엽이 둘려 있는데 연판과 연판 사에도 판단이 있어 연판이 중엽처럼 보인다. 연판 아래에는 두 줄의 횡대가 둘려 있고 그사이에 국화꽃 모양의 화판이 9개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장식되어 있다. 종신 상부에는 8괘로 장식하고 또한 8괘 아래에 3가닥의 횡대가 둘리고 종선으로 상하 8개의 방형 구획이 마련됐다. 구획 내의 각과 곽사이에 세로로 긴 장방형 가진지가 마련되고, 간지와 곽 안에 명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종구(鐘口)는 8 능(稜)을 이루고 종구의 능선과 평행 하는 넓은 소문대(素文帶)가 돌려져 있으며, 이 소문대 위의 선과 종신의 최하 횡선 사이에 생기는 간지에 당좌 4개를 배치했다.

 

간지와 곽 안의 명문은 시주인, 동역인(董役人), 장인(匠人) 등의 성명이 기록되었고, 그중 하단의 곽 안에, “大宋懷州修武縣 百巖山崇明寺 紹聖丁丑歲 丙戌念三日鑄 鐘一顆(대송회주수무현 백암산숭명사 소성정축세 병술염3일주 종1과)”라는 명문이 있다. 이 명문에 따라 중국 하남성(河南省) 회경부(懷慶府) 수무현(修武縣)에 있는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점과 주종 연대가 북송의 철종 소성 4년(哲宗紹聖四年), 즉 1097년(숙종 2)임을 알 수 있다. 이 종이 어떻게 전등사에 오게 된 것은 일제 말기 금속류의 강제수탈 때 빼앗겼다가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신앙심이 높은 불교 신도에 의하여 다시 전등사에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어온 것이라 한다.

▲ V자 상흔 소나무 

 

전등사 경내를 둘러보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많이 보인다. 큰 소나무에는 어김없이 V자 모양의 상흔을 안고 있다. 일본이 일제강점기 전쟁물자인 송탄유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전역의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하면서 생긴 상처이다. 또한 경내에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다.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두 은행나무 중에 하나 나무는 노송나무, 다른 한 나무는 동승나무 또는 암컷과 수컷 나무라 한다.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 가까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데, 이곳의 암컷 은행나무는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다고 한다. 왜 꽃은 피고 열매를 맺지 않을까 하는 해답은 조선 철종 때 숭유억불 정책에 은행 공출에 엮어진 전설에서 찾게 되면 전등사 경내의 숲속을 가벼운 마음으로 거닐 수 있을 것이다.

 

▲ 전등사 은행나무 

 

전등사 경내는 정족산의 삼랑성이 병풍처럼 둘려 있고 소나무, 은행나무, 참나무, 팥배나무 등이 가득 차 있어 늘 자연과 어우러져 있다. 새소리, 나뭇잎이 서로 합장하여 향음을 늘 늘려주는 사찰이어서 많은 불자와 관광객이 찾는 기도처이고 힐링의 공간이기도 하다. 삼랑성을 돌면서 잔잔한 이야기가 숲으로 스며들어 전등사에 이르면 햇살에 익고 있던 은행나무 잎도 소나무 잎도, 팥배나무 잎도 실바람을 끌어들인다. 다시 왔던 동문을 향해 걸으며 한창 피는 꽃무릇이 잎을 기다리며 꽃을 피우고 손짓하지만, 아픔을 안고 있는 소나무의 상흔에 기운을 물어주며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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