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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을 관리한 사찰 ‘강화전등사’1

문화재 : 강화 정족산사고지(인천시 기념물 제67호),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보물 제178호)

  • 기사입력 2020.10.21 09:08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가
▲ 정족산 사고지 외상문  

 

정족산사고는 전등사 서쪽 약 150m 위치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은 초기부터 <조선왕조실록>을 춘추관, 충주, 성주, 전주 등 네 곳에 보관하였다가 임진왜란 때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옮기게 됐다. 다시 마니산사고로 옮겼으나 효종 4년(1653) 11월 실록각의 실화사건으로 많은 사적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산성 내에 사고건물을 짓고 현종 1년(1660년) 12월에 남아있는 역대 실록과 서책들을 옮기고, 오른편에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 정종산 사고지 장서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일시 점거한 프랑스의 해병들에 의해 정족산사고의 서적들이 일부 약탈당하기도 했다. 이 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 실록 및 서적들은 서울로 가져가기도 하고, 일부는 약탈당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춘추관(春秋館)의 관장 하에 관리돼왔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의정부에서 관원이 파견되어 강화군수와 협력하여 관리하고 포쇄(曝 )를 실시하며 보존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부터 정족산 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들 및 규장각의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移藏)됐다. 이후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겨진 뒤, 광복으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 발전되면서 서울대학교에 옮겨 보존, 관리되고 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가 1999년 장사각과 선원보각이 복원되어 두 건물의 현판을 다시 달았다.

 

▲ 선원보각  

 

자연석을 다듬어 8단의 계단을 두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솟을삼문을 세우고 좌우에 흙과 돌을 이용하여 토석담을 쌓고 지붕을 얹었다. 안쪽에는 6단의 경사진 마당 가운데에 자연석으로 계단을 두고 그 위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 장사각이다. 기단은 회와 돌을 이용하였고 그 위에 전돌을 이용하여 화방벽을 둘렀고 그 위에 좌우 두 칸을 한쪽은 회벽을 하고 한쪽은 판문을 달았다. 건물의 가운데 칸은 출입문으로 판문을 두 짝을 달아 여닫도록 했다. 바닥은 판자를 이용해 우물마루로 하였고 천정은 연등천장으로 정교하게 짜였다. 선원보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의 한 칸을 퇴칸으로 두고 뒤쪽에 칸마다 별도의 문을 내었다. 좌우의 칸에는 판문을 달았고 가운데 칸은 하방과 상방에는 회벽을 하고 중방에는 정자살문 두 개를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다. 가운데 정면에 ‘선원보각’의 현판을, 건물의 지붕 좌우에는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풍판을 달았다.

 

삼랑성 내에는 강화도의 대표적 사찰인 전등사가 자리하고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승려 아도화상이 진종사로 창건하였으나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 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605년과 1613년 12월 화재로 인해 전소되었으나 1614년에 재건을 시작하여 1625년에 옛 모습을 갖췄다.

 

숙종 4년(1678) 조선왕조실록을 이곳에 보관하면서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다.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지었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다.

 

전등사의 가람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전통사찰과는 달리 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등의 출입문을 두지 않고 누각인 대조루가 그 역할을 한다.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 명부전, 삼성각, 향로전, 적문당, 강설당, 종각 등이 각 요소요소에 위치하고 있다.

▲ 대조루  

 

대조루는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의 ‘전등사시’에서 대조루를 다룬 시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후 영조의 시주로 대웅전과 함께 중수(영조 25)했으나, 1841년(헌종 7)에 다시 지었다. 현재의 대조루는 1932년에 크게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를 한 팔작지붕을 한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강당 아래를 통해 사찰을 출입한다. 대조루는 사찰을 찾는 신도들이 잠시 쉬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만든 건물이다. 누각의 문을 활짝 열어 먼 곳에 강화해협(염하)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건물의 외부에는 ‘전등사’의 현판이 걸려있고 내부에는 ‘대조루’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누각의 사방문은 안쪽에 유리문을 하고 밖으로 판문을 달았다. 누각의 출입은 대웅보전 앞마당에서 다리를 놓아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대조루 마당 앞에는 높은 기단 위에 두 날개를 펴고 날아갈 듯한 모습의 대웅보전이 위치하고 있다. 대조루와 대웅보전이 함께 마당을 사용한다. 대조루는 낮은 곳에, 대웅보전은 높은 곳에 있어 내려다보는 듯하다. 대조루는 ‘서해의 조수가 보인다’는 뜻으로 2층은 대웅보전을 바라보며 의식을 치르는 곳이다. 대조루 아래를 통과해야만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다.

▲ 대웅보전

 

대웅보전은 광해군 때인 1621년에 지어진 조선 중기의 건축양식이다. 창공을 향해 날아갈 듯 치켜 올라간 지붕의 곡선과 안쪽에 지붕을 받치는 보에 장식된 용머리 모양, 불단위에 있는 화려한 닫집이 대웅보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을 쌓고 가운데에 8단의 계단이 놓였다. 불교에서 8단의 위는 극락세계의 영역이다. 계단 소맷돌 좌우에는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돌확에 물을 담아 두었다. 몸과 마음이 깨끗한 상태로 극락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것 같다. 자연석을 다듬은 사각형의 돌을 주춧돌을 놓은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로 용마루 가운데에는 청기와 3장이 올려 있다. 언제부터 있었던 기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청기와는 조선 시대에 굽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청기와가 사찰에 사용된 것은 왕실과 특별관 관련이 있어야 했었다.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어서 청기와를 사용했던 것으로 본다.

 

정면의 각 기둥에는 주련이 걸려있는데 ‘불신보편시방중(佛身普遍十方中) 월인천강일체동(月印千江一切同) . 사지원명제성사(四智圓明諸聖士) 분림법회리군생(賁臨法會利群生)’이다. '부처님은 온 세상에 계시니 천 개의 강에 달그림자 비치는 것과 같다. 사지에 밝으신 모든 성스러운 분들 큰 법회에 오셔서 많은 중생 이롭게 하네'라는 뜻이다.

 

추녀 아래 귀포 위에 앉아 있는 나부상을 장식하였다.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 것이라고 정설로 전해오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것은 보는 사람마다 여인상으로 보는가 하면 원숭이 상이라 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여인상으로 보는 것보다 원숭이 상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할 것 같다. 벌거벗은 나부상은 여성을 성적 인격적으로 비하하고 모독함으로써 자신의 허약하고 상처받은 내면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불안한 심리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벌거벗은 못난 여인상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추녀 아래에 앉힘으로써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 전등대 대웅보전 나부상  

 

나부상이 아니라 길상과 벽사를 상징하는 원숭이 상으로 보인다.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앞의 원숭이 상, 선암사의 원숭이 돌조각, 송광사 일주문 소맷돌의 원숭이 상, 팔만대장경 판각처로 알려진 강화 선원사 절터에서 발굴된 원숭이 상 등이 길상과 벽사를 상징한다. 일본의 동조궁에는 귀를 막는 원숭이 상, 입을 막는 원숭이 상, 눈을 가리는 원숭이 상이 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나쁜 것을 보게 해서는 안 되고, 듣게 해서도 안 되고, 말하게 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전등사 대웅보전의 원숭이 상은 네 개 중에 두 개는 두 귀를 막고 두 개는 한쪽 귀를 막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귀를 막은 조각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마 세상사에 물들지 않겠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원숭이는 자비심과 자기희생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동물로 불교에 나타나고 있다. 경전에 원숭이는 부처님에 꿀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의 목욕을 위해 흙을 파 목욕탕을 만들었다고 한다. 인간과 교감을 나누거나 조력자로 등장해 부처님을 존경하고 법을 지키는 역할을 상징한다.

 

대웅보전을 구성하고 있는 배흘림이 있는 원기둥은 모두 13개인데 7개는 느티나무, 5개는 소나무, 1개는 은행나무로 만들어졌다. 정면의 4개의 기둥은 왼쪽부터 차례로 느티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로, 서로 다른 재질로 되어 있다. 파도가 치는 듯 활달한 무늬를 가진 느티나무와 정갈하고 소박한 느낌의 소나무, 듬직한 은행나무 기둥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건축물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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