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두시오. 과인은 세객 따위의 말은 믿지 않소. 게다가 유세를 들을 처지도 아니지 않소!”
당시는 진의 소왕 36년이었다. 그 동안 진나라는 남쪽 초나라 2개 군을 빼앗은데다, 초나라 회왕을 억류해 객사까지 시켰고, 동쪽의 제나라 민왕마져 깨뜨렸으며, 그 힘을 믿고 한때 제(帝)라 칭하며 거들먹거리기도 한데다가, 막강한 군사력으로 삼진(三晋:韓. 魏 趙)까지 괴롭히고 있던 터라, 왕계로서는 진왕의 ‘세객 불 필요’ 주장은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는 나라 왕으로서의 기고만장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들을 처지가 못된다’고 소리친 것은, 재상 위염과 화양군이 왕의 외삼촌이요, 경양군과 고릉군은 왕의 친동생들로서 그들 끼리 똘똘 뭉쳐 진나라의 세력을 부리고 있었는데, 장록이 아무리 훌륭한 경륜을 지닌 인물이라 하더라도 저들이 있는 한 쓸 데 없는 면담일 수 밖에 없다는 진왕의 한탄어린 고백으로 왕계는 들어야 했다.
진왕이 자리를 떠 버렸으므로 왕계는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범수는 속절없이 초라한 숙소에서 부실한 음식을 들며,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신세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따분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간혹 얼굴을 디밀던 왕계가 더욱 송구스럽다는 표정을 띠고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