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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

문화재 : (보물)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 (보물)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 / (보물)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
소재지 : 경남 양산시 하북면 통도사로 108, 통도사 (지산리)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모악

  • 기사입력 2022.08.01 08:50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 대기자
▲ 통도사 금강계단 편액  

사찰의 불상은 경내의 가장 크고 높은 건물 내와 건물 밖 높은 곳에 모신다. 또한 적멸보궁이라 하여 건물 밖에 계단을 두어 불사리를 모시는 곳도 있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달성의 용연사 석조계단, 김제 금산사의 방등계단 등이 현재 대표적인 계단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계단은 석가모니불 당시 인도에서 누지보살계단을 쌓고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게 되면서 기원정사 동남쪽에 단을 만들게 된 것이 시원으로 보고 있다. 그 후 249~255년에 중국에서 세웠고, 그 뒤 당나라 때의 율사 남산이 영감사에 계단을 세웠다.

▲ 통도사 금강계단 적멸보궁 편액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고승 자장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을 득도케 하였다.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 통도사 금강계단 석문 

1379년(우왕 5) 고려 말에 왜구들이 빈번히 침입하여 계단은 수난을 겪었다. 이색<양주통도사석가여래사리기>에 의하면, 통도사의 주지 월송이 왜구의 침입을 피해 1379년 8월 24일 석가여래의 사리와 가사 등을 챙겨 서울의 평리 이득분을 만난 일이 있었다. 또한 의승장 유정은 통도사의 사리를 대소 2함에 나누어 금강산에 있던 휴정에 보냈다. 휴정은 금강산도 안전한 장소가 아니고 영축산이 뛰어난 장소이고 문수보살이 명한 곳이라고 하였다. 계를 지키지 않은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신보가 목적이 아닐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 계단을 수리하여 안치하라고 하였다. 1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1함은 태백산 갈빈지에 안치하였다. 그 뒤 1603년(선조 36) 계단을 다시 복구하였고, 1652년(효종 3)에 정인이, 1705년에 성능이 중수하였다. 그 뒤 영조, 순조, 고종 대에 걸쳐 여러 차례 중수된 후 1919년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통도사 금강계단  

불사리를 모신 곳을 금강계단이라 하며 이곳에 부처님이 상주하고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금강이란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며, 금강과 같은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지혜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삼학 가운데 계율이 으뜸이므로, 계를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하는 데는 불사리를 봉안한 곳이 으뜸이라는 뜻에서 금강계단이라 부른다.

▲ 통도사 금강계단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이중의 넓은 방단 위에 석종의 부도를 안치하였다. 석단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 기단 상하 면석에는 비천상, 불보살상을 배치하였다. 석단 외곽에는 석조 난간을 돌렸고, 계단 정면에는 석문(石門)을 두었으며, 계단의 층면석에는 총 32구의 불보살상을 나타냈다. 계단의 상층 중심부에 위치한 석종부도는 복련과 앙련의 상하 연화대 위에 위치하며, 그 조각 수법이 다른 조각들과는 달리 매우 우수하다.

▲ 통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의 전면에는 대웅전이 자리하고 있다. 다른 정각과는 달리 정면의 너비가 측면보다 좁은 장방형의 건물이다. 전각 내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다. 건물 후면에 있는 금강 계단을 향하고 있고, 불이문을 들어섰을 때 마주 보이는 측면에도 합각을 만들어 양쪽을 강조한 특이한 건물이다. 건물의 삼면에는 대웅전, 금강계단, 적멸보궁 등 각기 다른 편액이 걸려 있다.

▲ 금산사 금강계단 

금산사의 금강계단은 손대라고 부르는 높은 대지 위에 형성된 2중 방형 기단 위의 중앙에 석종형 사리탑이 세워진 모습으로 방등계단이라 부른다. 방등계단이 만들어진 시기와 어떤 사상에 의해 세워졌는지 정확한 자료가 없다. 다만 762년 금산사를 중건한 진표율사의 사상이 참회에서 미륵의 수계로 이어진 것에서 진표율사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혜덕왕사에 의해 금산사가 크게 중창될 당시 재조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계단을 특별히 방등계단이라 하는 것은 불교의 정신을 대표하는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근본이 계에 있고 계를 지키는 것은 불교의 기본 토대가 되므로 계의 정신이 일체에 평등하게 미친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다.

▲ 금산사 금강계단  

계단이 위치하는 지점은 대적광전의 동북편, 미륵전을 중심으로 한다면 우측 독립된 구릉에 위치한다. 계단의 남쪽에는 고려시대의 5층 석탑이 중심선을 약간 달리하여 있다. 계단의 구조는 상하 2단의 정방형 기단 위에 석종형 사리탑을 놓은 모습이다. 하층 기단은 한 변의 길이가 1,250cm, 높이 80cm이며, 상층기단은 길이가 850cm, 높이가 60cm에 이른다. 기단의 외곽에는 장대석을 이어 붙여 사리탑의 경기를 두고 그 안쪽에 사리탑을 축조하였다. 기단의 면석에는 고려시대의 기법이 잘 표현된 불상과 신장상을 돋을새김하였는데 조선시대의 추정되는 것도 보인다. 하층 기단 3면에는 난간을 설치한 흔적의 석주가 있다. 이 석주마다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고 난간의 사방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세웠는데 이것은 기단 영역의 내부가 성스러운 공간임을 의미한다. 상층 기단의 중앙부에 정사각형으로 1장의 대석(臺石)을 놓았는데 대석 모서리에는 네 마리의 사자머리를 밖으로 향하여 조각하였다.

▲ 금산사 금강계단 석인상

대석 중앙부에 탑신 접합부를 따라 복판연화문을 둘러 새겼다. 탑신은 평면 원형의 종형으로 밑부분 둘레에는 화문대를 둘러 흡사 범종의 구연대와 같다. 머리 부분에는 9개의 용머리를 조각한 별석을 얹고, 구룡의 머리 위로는 연꽃무늬를 장식한 앙화를 얹고 그 위로는 위아래가 납작한 공 모양의 복발을 놓고 맨 위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무가보개석을 얹어 올렸다. 

▲ 금산사 금강계단 면석 문양

현재 남아 있는 계단형식의 사리탑 중 완전한 모양을 이루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문 상황이므로,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는 김제 금산사 금강계단은 매우 귀중한 유물이다.

▲ 용연사 금강계단  

본래 동화사의 말사인 용연사는 신라 신덕왕 3년(914) 보양이 창건하였다. 조선시대에 와서 세종 1년(1419)에 천일이 중창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창과 쇠락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연사에는 석조계단이란 명칭으로 불사를 봉안하였는데, 이것은 통도사 금강계단을 모방한 것으로,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용연사 경내에 세운 사바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 기록을 통해 광해군 5년(1613)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754년 세워진 용연사 사적비와 석가여래중수비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기록되었다. 

금강계단은 높이 2m. 석재로 만든 계단으로, 석재난간으로 테두리를 두른 탑구 안에 있다. 앞에는 배례석과 석등이 있다. 계단은 위아래 2층의 받침돌 위에 석종형 몸돌을 올린 모습이다. 위아래 받침돌은 여러 장의 큰 돌과 널돌로 면석과 덮개돌을 조립하였다. 위층 받침돌의 면석에는 좌우 양쪽의 기둥과 함께 가운데 기둥이 가지런하게 조각되었는데, 가운데 기둥의 좌우 양쪽 면에는 각각 1구씩, 면마다 2구씩 모두 8구의 팔부중상이 새겨져 있다. 아래층 받침돌 바깥쪽의 네 귀퉁이에는 사천왕상으로 보이는 신장상이 1구씩 배치되어 있다. 위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제법 두툼하고 널찍한 편인데, 가운데 부분에는 하나의 돌로 만든 높직하면서 네모난 굄돌이 놓여 있다. 굄돌의 윗면에는 높고 낮은 2단의 둥근 굄이 돋을새김 되었고, 굄 위에는 몸돌이 올려져 있다. 몸돌은 조선 후기에 흔히 조성된 석종형으로, 가운데 부분은 넓지만, 위아래 부분은 점차 좁아진 모습이다. 윗부분에는 2장의 꽃잎을 아래로 내린 가늘고 긴 복련(覆蓮)의 연꽃무늬가 둘러 새겨져 있고, 상단에는 가늘고 긴 형태의 2중 연꽃 문양 장식이 전면을 두르고 있으며 가늘고 긴 1단의 고임대를 가늘게 돋을새김하였다. 그 위로는 넓적하면서 낮은 연꽃잎을 둘러 세움으로써 장식성을 강조하였다. 외곽은 능형(菱形)을 그리며 8엽을 형성하였는데 그 안에 꽃봉오리 형태의 보주를 올려놓았다. 연꽃 봉우리 형태 보주는 2중으로 보주 표면에 돋을새김 장식했다.

계단의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 기법이 정교한 점, 1613년이라는 확실한 조성 연대가 있어 당시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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