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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고향의 선거판, 과연 이대로 좋은가?

"남부와 북부지역의 갈등(葛藤)은 하나 되고"
"얼룩진 공직선거법 위반은 반드시 엄중한 책임(責任) 물어야"

  • 기사입력 2022.05.31 20:54
  • 기자명 김영국 객원논설위원
▲ 김영국 계명대학교 벤처창업학과 교수.한국 메타버스협회 고문

매번 선거철이면, 넉넉한 필자의 고향 창녕 인심은 양은냄비처럼 달아올라 남부와 북부지역의 갈등으로 쪼개진다. 마치 등나무와 칡나무의 갈등(葛藤) 같다. 장날마다 찾아오는 사기꾼들의 투전판(投錢版)과 같아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어이)는 맷돌의 손잡이. 손잡이가 없는 맷돌은 무용지물이다. 고향의 선거용 TV 토론회를 몇 차례 반복·정취하여 면밀하게 분석해 본 필자의 견해다.  

오직 세 치 혀로만 날름거리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일부 후보들의 급조된 공약(空約)들. 꼼꼼히 살펴보니 더욱 어이가 없을 정도다. 초등학생도 익히 아는 실천 가능한 공약 여부, 주민투표, 6차산업의 개념과 융합, 관련 법규 등의 전문성과 이해도가 극히 부실한 게 단편적인 큰 예다. 귀신이 곡(哭)할 노릇이다. 한심스러울 정도다.

매일 밤낮 없이 수없이 날라 오는 상대 후보 비방과 도대체 근거 없는 유언비어 문자들이 유권자를 더욱 지치게 한다. 곳곳의 선거법 위반은 봇물의 큰 구멍과 같다. 반드시 법의 심판으로 끝까지 무거운 책임을 물어야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조급해하며 근거 없이 상대를 비방하는 후보자는 선거에서는 종종 패자가 되는 게 인과응보(因果應報)다. 내로남불의 전형(全形)이다.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사실임에도, 근거 없는 상대 비방과 일부 언론의 단순한 퍼나르기식 기사들에 현혹될 유권자가 과연 얼마나 있을까?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다. 유권자(민초)의 투표가 ‘밥’이라면, 공약(公約)은 맛난 ‘반찬’이다. 어설픈 반찬처럼, 둥둥 떠다니다 바로 사라지는게 곧 어설픈 공약(空約)들이 아닐까? 철저하게 잘 준비된 실천가능한 공약에는 반드시 <공정과 컨텐츠>가 있다. 왜냐하면, 마치 촘촘한 멸치잡이용 그물망이요, 건실한 고래잡이용 그물망 같은 공약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유권자의 눈과 귀와 입은 늘 옳고 그름의 신호등이요, 나침반이라 냉정하고 매섭지 않던가?. 왜냐하면, 유권자의 철저한 판단기준은 늘 펄뜩이는 물고기 같은 후보자의 자질과 공약이 우선시되기 때문이다. 특히 ‘씨 뿌려 거두는 고향의 농심(農心)에 기반한 민초(民草)들은 늘 냉정한 심판을 하지 않던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색깔이 중요하지는 않다‘던 등소평의 흑묘백묘(黑猫白猫) 주장처럼, 일단은 무조건 당선만 되고 보자(?)는 식의 지금 같이 혼탁하고 어이없는 고향의 선거가 난장판이라면 필자만의 주장일까? 

곳곳에서 난무하고 있는 불공정 선거판, 정정당당하지 못한 공약의 남발, 탈당과 입당을 반복하는 길잃은 뜨내기 선거용 철새 같은 정치꾼(?)들은 서로 까치와 까마귀라는 격한 논쟁과 전쟁을 쓸데없이 반복하고 있다. 이제 장날마다 공허(空虛)하게 흑색선전을 외치며 구걸하는 권모술수(權謀術數)와 잘못된 표몰이식의 선거운동은 반드시 지양(止揚)되어야 한다.  

고향의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여, 감나무 이파리가 무성하다고 해서 감이 많이 열릴까? 천만에. 가지마다 피는 감꽃 하나하나가 곧 감이 된다는 게 자연의 섭리요 농심이다. 오월의 고향 들판. 가을의 결실을 위해 씨를 뿌리며. 오월의 들판에서 오늘도 땀을 흘리고 있는 농심의 흙뭍은 두 손을 꽉 잡는 후보가 승자(勝者)다. 왜냐하면, 고향 유권자(농심)의 귀중한 한 표가 곧 혼탁한 선거판의 유일한 극약처방이요, 특효약이기 때문이다. 

내일 6월 1일이면, 농심이 결정한 민선 9기 후보가 결정된다. 선거 때마다 또 갈라지는 고향의 남부와 북부가 이제는 하나 되어야 한다. 개표 후 크게 웃고 우는 자의 큰 포용과 격려의 악수가 꼭 실천되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고향의 농심이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필자의 고향 곳곳에 널리 퍼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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