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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극의 방황... 불쌍한 말만 죽었다

  • 기사입력 2022.01.23 11:42
  • 기자명 장경순 대기자
▲ 동물보호단체가 21일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태종 이방원' 드라마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도중 사고로 말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낙마장면을 연기한 대역배우도 심각한 위험을 감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기간방송사 KBS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국제사회에서 G8으로 발돋움하는 나라의 공영방송이 생명존중에 대한 미개한 태도를 드러내고 말았다.

사극을 애호하는 시청자들도 이게 위험을 무릅써 가면서 촬영할 장면이었냐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역사적 사실을 떠나 현재 진행 중인 드라마 흐름에서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는 장면이 무슨 결정적 장면이라고 애꿎은 말의 목숨까지 희생시켰냐는 것이다.

어린 시절인 1972년 임진왜란부터 KBS 사극을 시청하면서 역사공부도 해 온 기자는 이번 사고에 대해 공영방송의 위상에 걸맞은 제작은 못하고 엉뚱한데서 욕심을 부리다 빚은 참사임을 지적한다.

이 드라마가 사고로 2주 결방에 들어가기 전, 나름 재미를 붙이며 보고 있었지만 군데군데 ‘정통사극’이라고 도저히 볼 수 없는 낯 뜨거운 장면들을 애써서 무시해오고 있던 터다.

사극이라고 해서 역사책에 적힌 그대로 각색할 필요는 없다. 사극 역시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권위 있는 역사드라마를 잘 만드는 히스토리채널의 바이킹에서는 노르만족의 시조인 롤로가 활동시기를 50년가량 앞당겨 등장했다.

그러나 정통사극이라고 한다면 ‘팩트’의 일부 가공을 하더라도 그 시대 그 사람들이 살아가던 정서에 반하는 장면이 나와서는 안된다. 이런 점에서 ‘태종 이방원’은 KBS 정통사극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는 장면들이 몇 차례 있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이 너무나 함부로 칼을 뽑아든다. 태조 이성계 아들들이 서로 칼을 빼들고 위협을 하기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칼을 뺀다는 건 오늘날 장난감 총조차 서로에게 겨눠서는 안되는 것 이상의 극단적인 행동이다. 이 또한 제작진이 쓸데없는 과잉액션을 넣으려고 시대상을 저버린 것으로 지적한다.

대궐의 군사들이 왕자들 입궁을 저지한다고 칼을 빼서 위협하는 장면은 KBS의 이전 작품 ‘정도전’의 민망한 장면에 비하면 애교라 할 것이다. ‘정도전’에서는 왕자들의 사병을 몰수하러 간 정도전의 군사들이 정안군 이방원에게 활을 겨누는 장면이 있었다.

임금의 자식들은 ‘금지옥엽’이라는 말을 갖고 있다. 부모인 임금이 살아있는데 그 자식에게 칼을 빼들고 활을 겨누면 임금이 한때 분노가 가라앉아 차분한 심정이 됐을 때 어떤 심정이 들까. 아무리 총애가 두터워 권력을 휘두르는 신하도 군신간 신뢰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초래하게 된다. 정치적 관점이 탁월했다는 평을 듣는 ‘정도전’에도 이런 허점이 있더니 8년 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명나라 황제 주원장 앞에 있는 무사들이 칼을 들고 있는 것은 다른 방송극의 무협극 ‘뿌리 깊은 나무’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망발이다. 전각 안에는 임금 아닌 그 누구도 무기를 가질 수 없다는 기본이치조차 모르고 ‘KBS 대하사극’을 만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사극이라고 해서 판에 박힌 역사기록대로 드라마를 써야 되는 것은 아니다. 창작물인 이상, 사건에 대한 각색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정통사극’이라고 한다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 원칙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옷은 옛날 옷이지만 머릿속에 5G 시대 사고방식이 있다면 이것은 퓨전사극이다. 정통사극을 제작하는 사람들은 폭넓은 역사지식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감각을 체득하고 있어야 한다.

기자는 1973년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 ‘전하’가 아닌 ‘성상폐하’의 대사가 나오는 것을 들으면서 고려가 왕호를 쓰면서도 그것이 주나라 천자와 동급인 왕의 의전을 썼음을 배웠다. 물론 이것은 커가면서 좀 더 공부를 한 것들이 더해진 지식이다.

경쟁방송국들이 광고수입 더 벌어들이려고 억지스런 퓨전물을 들고 나와 사극이라고 할 때 1970년대 KBS만은 정통의 길을 줄곧 걸어간 것으로 평가한다. 전두환이 집권하던 1980년 두 방송국 수양대군의 서로 다른 모습에서 이런 KBS 저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KBS 사극마저 언제 또 민망한 장면이 나올지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보게 된다. ‘국본’이란 단어 한번 주워들었다고 세자가 입만 열면 “내가 국본이다”라고 떠들고 다닌 드라마도 있다. 원래 세자를 대체하는 말로 많이 쓰인 것은 저군이나 원량 등이다.

이 나라의 민족 영웅을 다룬 드라마는 작가의 역량 결핍으로 제갈양의 동남풍, 하후돈의 눈알 씹어먹기 를 모방해 위대한 우리 역사를 중국의 삼국지 아류로 전락시켰다. 이러다가는 KBS 사극들이 ‘야인시대’와 같은 장르로 분류될지도 모를 일이다.

갈수록 심해지는 KBS 사극의 방황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광고 안들어오는 제1TV에 주말 9시 뉴스 바로 다음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는 것은 방송국의 의도만큼은 여전히 정도의 길에 갈 것임을 보여준다.

공영방송의 정통사극이란 시대상을 표준적으로 반영하는데 있는 것이지 자극적인 액션장면에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무고한 말의 생명까지 희생시켰다면 더 할 말이 없는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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