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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첫 한국인, 고종의 특명전권 공사 민영환

[연재 3회]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석 후 귀국길에 횡단열차 탑승
모스크바까지 갈 때 48일, 올 때 두 달

  • 기사입력 2022.01.21 18:01
  • 기자명 이정식 작가

◉ 민영환, 1896년 러시아 황제 대관식 참석 후 귀국길에 횡단열차 탑승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처음 탄 사람은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이다. 그는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고종을 비롯해 동포와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인물이다.

민영환은 1896년 고종의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윤치호, 김득련, 김도일 등 사절단을 대동하고 길을 떠났다. 당시 러시아의 수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으나 대관식은 모스크바에서 거행됐다.

▲ 고종의 특명전권공사 민영환,1896년 러시아에서 찍은 사진

민영환은 대관식 참석 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국서를 전했다. 니콜라이 2세 황제의 대관식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듬해 5월에 있었다. 고종이 명성황후의 친정 조카이기도 한 민영환을 대관식에 보낸 것은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황후 시해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고종은 일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1896년 2월부터 세자를 데리고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있었다. 이를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고 하는데 이 같은 기막힌 상

태는 약 1년간 계속됐다. 민영환은 니콜라이 2세에게 고종을 보호해 줄 러시아 병력의 지원 등을 요청했으나 별 신통한 대답을 얻지 못했다.

민영환이 당시 인천 제물포항에서 출발해 대관식이 열린 모스크바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날수는 48일이었다. 일행은 1896년 4월 2일 러시아 군함편으로 출발했다. 그러고는 중국의 상해와 일본의 나가사키, 요코하마를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기차를 타고 대륙을 횡단했으며 몬트리올을 경유해 미국 뉴욕에서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넜다. 그리고 영국을 거쳐 네덜란드에 다다른 후 다시 기차로 독일과 폴란드를 지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요즘엔 비행기로 9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당시엔 그처럼 멀고도 험한 여정이었다.

▲ 모스크바 크렘린궁 앞의 붉은광장

◉ 모스크바까지 갈 때 48일, 올 때 두 달

돌아올 때는 기차와 마차, 배를 번갈아 이용하며 시베리아를 지나서 왔다. 지구를 완전히 한 바퀴 돈 셈이다. 한국인 최초의 세계 일주였다. 8월 19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10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했으니 두달 남짓 걸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부터 여러 구역에서 기차를 탔기 때문에 그나마 두 달가량 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공구별로 완공된 곳도 있었고, 아직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있었다.

앞에서 말했지만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시절인 1891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을 마치고 육로로 시베리아를 지나 돌아갈 때는 석 달이 걸렸다. 민영환 일행의 경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물포까지 배를 탄 4일을 빼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데 걸린 기간은 두 달이 채 되지 않는다.

민영환 일행의 귀국 경로를 다시 살펴보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발,모스크바를 지나 볼가 강변에 있는 니즈니노브고로드까지는 기차로, 니즈니노브고로드부터는 배를 타고 카잔을 거쳐 볼가 강과 사마라 강이 합류하는 사마라까지 와서 다시 기차를 탔다. 당시 철도는 도스토옙스키가 유형 생활을 했던 옴스크를 지나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만 완공되어 있었다.

이후로는 마차와 배를 타고 여행했다. 9월 11일 시베리아 총독부가 있는 이르쿠츠크에 도착했고 9월 14일 바이칼 호수를 건넜다. 호수 건너 미소바야부터는 마차로 여행했다. 일행은 지나는 길에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도 공사를 보았다. 3년 안에 준공되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보름 안에 닿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후 헤이룽장(黑龍江, 흑룡강)에서 배를 타고 달네레첸스크까지 간 후에는 다시 기차를 타고 414km 떨어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른 다음 여기서 배로 부산을 거쳐 제물포로 돌아왔다.

◉ 잔칫상에 웬 쇠스랑과 장도인가?

민영환은 러시아에 다녀와서 일기 형식의 기행문 《해천추범(海天秋帆)》을 남겼고, 그를 수행한 특명전권공사 2등 참서관 김득련은 기행문을 한시로 남겼다. 2007년 ‘도서출판 책과함께’에서 펴낸 《해천추범》(민영환 지음,조재곤 편역)을 보면 김득련의 짤막한 러시아 인상기 한 편이 삽입되어 있는데 재미있다. 러시아 궁중 연회에서 보고 느낀 바를 기록한 것이다.

동방예의지국 조선을 떠나 난생처음 거대한 여객선에 몸을 싣고 보니 진기한 것 일색이로다. 이상한 색깔이지만 눈 하나는 시원한 서양의 요조숙녀들. 어찌 그리 요란한 옷을 입고 있는가? 내 얼굴이 잘생겨서일까,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을 몰라서일까? 거침없이 군자의 옆자리에 다가와 재잘대누나. 양반네 잔칫상에 웬 쇠스랑(포크)과 장도(나이프)는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이 참으로 고역이구나. 희고 눈 같은 것(설탕)이 달고 달기에 이번에도 눈 같은 것(소금)을 듬뿍 떠서 찻종지에 넣으니 그 갈색 물(커피)은 너무 짜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더라. 노르스름한 절편(치즈)은 맛도 향기도 고약하구나. 청중이 모인 자리에서 웬 신사가 목살에 힘줄이 돋칠 정도로 소리를 지르니(테너) 모두들 그를 우러러보더라. 서양에서 군자 노릇 하기란 원래 저리 힘든가 보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 빙빙 돌며 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는데(발레), 가녀린 낭자를 학대하다니, 서양 군

자들은 참으로 짐승이구나.

◉ 뜨거운 물을 공급하는 사모바르

앞에서 횡단열차 객실에 대해 설명했지만 좀 더 자세하게 횡단열차안을 살펴보자. 객실 밖은 복도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폭이 좁긴 하지만 한 사람이 지나다니기엔 별 불편이 없을 정도다. 열차 안의 복도 끝에는 승객들이 언제나 끓는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모바르가 있다. 사모바르는 원래 뜨거운 물을 오래 보존하는 구리 주전자를 말하는데, 열차 안의 사모바르는 벽에 걸려 있는 형태여서 주전자 모양은 아니고 단순한 물통처럼 생겼지만 항상 뜨거운 물을 공급해 주는 긴요한 설비다. 사모바르가 있기 때문에 차나 커피, 컵라면 등을 먹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 열차 안의 사모바르(오른쪽 작은 사진은 전통 사모바르) 

열차 한 량에는 승무원 2명이 탑승해 교대로 여객들을 돕는데, 승무원들의 방은 대개 사모바르가 있는 쪽에 있다. 승무원들은 열차표를 점검하고 베개와 베갯잇, 모포와 시트를 나눠 주며 화장실 관리, 청소 등의 일을 한다. 도착지에 내리기 전에 나눠 준 모포 등을 회수하는데 잃어버리면 배상을 해야 한다.

화장실은 차량 앞과 뒤에 하나씩 있으며, 기차가 정차하거나 출발하기 30분 이내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잠가놓는다. 화장실에는 작은 세면대밖에 없는 데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 수도꼭지 밸브를 아래에서 위로 눌러야 물이 나오도록 해놓았기 때문에 물을 편하게 쓸 수는 없다. 요즘엔 수도꼭지를 일반적인 것으로 바꿔놓은 객차도 있지만, 샤워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게 좋다.

횡단열차는 최고 시속 150km까지 속도를 낼 수 있지만 평균 70~80km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은 24량으로 이루어진 장대 열차들이다. 여객용 객차는 보통 21량이며 식당차와 소화물 차량이 한 량씩 물린다. 앞에서 열차를 끌고 가는 기관차는 중간중간 교대한다. 때문에 붉은색 기관차였다가 푸른색 기관차가 되기도 한다.

◉ 식당 칸과 보드카

▲ 보드카  © 김승동

러시아 사람들은 대체로 여행 중 먹을 음식을 갖고 열차를 타기 때문에 식당 칸은 외국인들이 더 많이 이용한다고 한다. 식당차는 보통 붉은색으로 일반 객차와 구분되어 있어 밖에서 보면 식당차가 어느 차량인지 쉽게 알수 있다. 식당 칸에서는 식사 이외에 간식거리와 안주류, 컵라면, 맥주, 보드카 그리고 우리나라 제품인 도시락 라면, 초코파이 등을 판매한다. 러시아에서는 오랜 영업의 결과 우리나라의 도시락 라면이 컵라면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았다. 식당의 식사 메뉴는 다양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

보드카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러시아의 노인들이 대개 할머니인 것은 남자들이 보드카를 너무 마셔 일찍 죽기 때문이란다. 러시아인들의 보드카 사랑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인 것 같다. 과거 고르바초프는 보드카가 나라를 병들게 한다고 생각해 집권하던 1985년부터 반(反)음주 운동을 강력하게 펼쳤다. 음주 가능 연령을 18세에서 21세로 올리고 밤 11시가 넘어야 술을 마실 수 있도록 법으로까지 정했다. 그런데 이 법은 사문화된 지 오래다. 지금은 그런 법이 있는 줄도 모른다. 대신 몇 년 전부터 밤 10시 이후에는 술을 팔지 못하도록 해놓았다. 국경일에도 술을 팔지 않는다. 이 법은 업소들이 철저히 지키고 있다.

밀, 감자, 수수, 옥수수, 포도 등을 원료로 하는 보드카는 우리의 소주처럼 색깔이 없지만 도수는 훨씬 높다. 거의 모든 제품이 알코올 도수 40도에 맞춰져 있다. 원소 주기율로 유명한 러시아의 과학자 멘델레예프(1834~1907)가 ‘물과 알코올의 배합 비율이 40%일 때 최상의 맛을 낸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보드카는 40도여야 한다’는 인식이 러시아인들에게 자리 잡았다고 한다. 또한 보드카는 8~10℃ 정도에서 마시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며 안주로는 염장한 연어나 청어, 송어를 얇게 썬 것을 권한다.

◉ 횡단열차가 지나는 ‘7개의 시간대’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6박 7일간 지나는 시간대는 7개다. 출발지와 도착지의 시차가 7시간이란 얘기다. 블라디보스토크와 이르쿠츠크의 시차는 2시간이며 이르쿠츠크와 모스크바는 5시간의 시차가 난다. 이르쿠츠크의 시간대는 예전에는 우리나라와 같았으나 지금은 우리나라보다 한 시간 늦다. 러시아 전체에는 11개의 시간대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가 있는 연해주에서 베링 해까지도 시차가 3시간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11개의 시간대 가운데 7개의 시간대를 운행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엄청난 크기를 실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기차 역사에 있는 모든 시계는 모스크바 시간을 알려준다. 현지 시간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객차 안에 게시된 열차 시간표도 모스크바 시간으로만 되어 있다.

▲ 역 주변의 노점상 

객차 복도 벽에는 정차하는 역의 이름과 도착 및 출발 시간이 적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역에서 북쪽에 있는 하바롭스크 역까지의 철로는 766km다. 약 12시간 30분가량 걸린다. 역의 크기에 따라 1~2분, 또는 3분·7분·15분 가량 정차하는데 하바롭스크는 큰 역이어서 30분간 정차한다. 정차하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이 시간 동안 역 밖으로 잠시 나가 역사의 전경과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자칫 멀리 가서 딴전 피우다 열차를 놓치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열차에서 멀리 떨어져 한눈파는 것은 금물이다.

◉ 아무르 강변의 하바롭스크

중국에서는 헤이룽장(흑룡강)으로 부르는, 거대한 아무르 강변에 자리한 하바롭스크는 극동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다음으로 큰 도시다. 인구는 약 60만 명이다. 도시 이름은 17세기 러시아의 탐험가 예로페이 하바로프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러시아 내전 중이던 1920년에는 반혁명 세력인 백군과 손을 잡은 일본군이 이 도시를 점령한 적도 있었다.

내전 중에는 조선인 독립운동가들도 많이 죽었다. 한국 최초의 공산주의 자인 김 알렉산드라는 1918년 백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고 34세의 나이에 처형당했다. 그녀의 시신은 아무르 강에 던져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는 10월 혁명 50주년 기념일인 1967년 10월, 그녀가 활동했던 카를 마르크스 거리에 기념패와 그녀의 조각상을 새겨놓았다.

하바롭스크 서쪽에는 ‘김유천 거리’도 있다. 김유천은 1921년 빨치산 부대에 들어가 백군과 전투를 벌였고, 1929년 러시아가 중국과 벌인 ‘중동철도 전투’에 참전했다가 큰 전공을 세우고 전사했다. 러시아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하바롭스크 역사 앞에는 이곳에 처음 도시를 개척한 하바로프의 동상이 서 있다.

◉ 이광수를 감동시킨 ‘아라사(러시아) 노점상’

하바롭스크 다음으로 30분간 정차하는 역은 이곳에서 기차로 10시간 가량 떨어진 벨로고르스크 역이다. 역 안 플랫폼 쪽에는 레닌 동상이 서 있다. 벨로고르스크 역을 지나 오래 머무는 역은 체르니쉐브스크 역인데, 이 역에서는 40분간 머무른다. 이르쿠츠크까지 가는 동안 거치는 역 중에서 가장 오래 정차한다.

정차 시간이 긴 역 주변에서는 음식물을 만들어 갖고 나와 파는 노점상들을 볼 수 있다. 과거에는 열차 앞까지 왔다는데, 일부 역에서는 역 구내로는 못 들어오도록 단속하고 있다고 한다. 노점상에서는 러시아 만두 등 각종 간식거리를 살 수 있다. 여름에는 과일과 음료 등도 판다.

필자가 2014년 2월에 갔을 때는 노점상들이 역사 밖에서 빵, 만두, 달걀,소금에 절인 돼지비계(쌀라) 등을 팔고 있었다. 그중 가장 색다르게 보였던 음식이 넓적한 두부 같은 쌀라였다. 적당한 두께로 잘라 샌드위치처럼 빵 사이에 넣어 먹으면 맛있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보니 ‘김에 싸서 술안주로 먹으면 끝내준다’라고 소개한 사람도 있다.

100년 전에도 노점상의 풍경은 비슷했던 것 같다. 이광수가 1914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면서 어느 정거장에서 본 풍경은 이러했다. 

얼굴이 붉고 투실투실한 아라사 부인들이 고기 삶은 것이며, 빵이며, 순대며, 이런 먹을 것을 프랫포옴에 벌여놓고 팔았다. 열댓 살 된 계집애들이 우유병을 두 팔로 꼭 껴안고 서서 사는 사람이 있기를 기다렸다. 나는 빵과 고기와 우유를 샀다. 그것들은 다 따뜻하였다.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하여 이렇게 추운 식전 새벽에 따뜻한 먹을 것을 가지고 나와서 그것을 식히지 아니할 양으로 애쓰면서 나를 기다리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는 진정으로 그들을 보고, 『불라고다류 와쏘(고맙습니다).』라고 외치지 아니할 수 없었다.(《그의 자서전》, 1936)

◉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였던 철도 교통의 요충, 치타

체르니쉐브스크 역에서 8시간 더 가면 시베리아 횡단열차와 중국의 만주 횡단열차가 만나는 철도 교통의 요충이며 군사도시인 치타가 나온다.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일 6시간가량이다. 인구는 32만 명이고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6시간이다. 치타는 제정러시아 시절 귀족 유형수인 데카브리스트들의 유형지로 유명해졌다.

데카브리스트란 ‘12월에 혁명을 한 사람들’이란 의미로 러시아어로 12월인 ‘데카브리’에서 나온 말이다. 역사책에서는 흔히 ‘12월 당원’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1825년 12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원로원 광장에서 있었던 새 황제(차르) 니콜라이 1세의 대관식에서 차르체제의 전복과 농노제도의 철폐 등을 통한 새로운 러시아의 건설을 기치로 혁명을 일으켰으나 당일 진압되어 사형 또는 시베리아 유배형에 처해진 러시아 귀족과 청년 장교들을 지칭한다. 영어로는 디셈버리스트(Decemberist)라고 쓴다.

공작 등 최고 귀족이었던 이들은 이곳 치타의 은광에서 일하며 노예와 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들이 유배 온 후, 부인들이 귀족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이곳에 와 남편들을 보살피며 평생을 시베리아에서 보낸 일은 감동을 주는 전설이 되었다.

정작 데카브리스트의 흔적은 2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는 동안 거의 없어져 찾기 어렵지만 치타 시내에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이 있어 종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8세기에 건립된 목조로 된 정교회 성당 건물에 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 치타 역 앞의 러시아 정교회 성당  

박물관이 된 이 교회는 과거에 데카브리스트들이 기도를 드렸던 곳이며, 데카브리스트 청년 장교 이반 안

▲ 작가 이정식

넨코프가 이곳까지 찾아온 프랑스 여인 폴리나 게블과 결혼식을 올린 곳이다.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프랑스 작가 알렉상드르 뒤마에 의해 1940년 《펜싱 마스터》란 제목의 소설로 출판되기도 했다.

또한 데카브리스트 발콘스키 부부는 딸 소피아를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치타의 데카브리스트의 아내들이 남편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살았던 지역은 후에 ‘담스카야(Damskaya, 여인의 거리)’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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