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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행복이란 변화를 창조하고 다르게 사는 힘"

  • 기사입력 2022.01.19 20:32
  • 기자명 천경 칼럼니스트
▲ 작가 천경, 칼럼니스트.<니체의 아름다운 옆길>저자  

새해부터 매월 격주(1,3주) 수요일마다 천경작가의 <일상에서 철학하기> 칼럼을 싣는다. 철학한다는 것은 사변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다르게 사는 실천이다. 지금과 다른 행복들을 사유하는 행위이다. 세상은 상처들로 넘친다. 철학한다는 것은 상처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행위가 아닐까? 그리하여 철학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바꾸는 혁명이 아닐까? <천경의 일상에서 철학하기> 칼럼을 통해 '한국NGO신문' 독자 모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깨달음과 생명력 충만한 삶을 경험하시기를 기대한다.(편집자 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다. 유튜브를 열다가 얻어걸린 것인데, 이후 종종 듣는다. 저마다 곡절많은 사연들을 풀어놓으면 스님은 즉석에서 유쾌 통쾌 상쾌한 해법을 내놓는다. 아픈 인생살이 문제가 몇 분간의 대화로 ‘해결’된다. 각자에게 주어지는 처방전이 재미있고 웃기기까지 하다. 저절로 소리높여 웃게 된다. 사연의 당사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웃긴 걸 어쩌랴! 종종 질문자 본인도 마침내 눈물을 훔치고 헤벌쭉 웃는다. 스님의 해법은 간단하다.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듣는 사람도, 사연을 말하는 사람도, 무거운 분위기에서 출발하지만, 스님의 답변이 시작되면 이젠 웃을 준비를 하면 된다.

내가 20대 후반 혹은 삼십 대 초반쯤이었을까? 친구를 따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정토법당이란 곳에 간 적이 있다. 그때 웬 청년스님이 설법을 했는데, 나는 설법보다는 저 청년은 어떻게 해서 스님이 됐을까? 스님이 된 것이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 자리에는 박노해 시인도 있었다. 그도 강연을 했는데 내용은 기억에 없다. 다만 그들의 해사한 얼굴이 나를 슬프게 했다. 나보다는 연배가 한참 위였는데 내 또래로 보였다. 나를 포함해서 당시의 청춘들이 측은하게 여겨졌다. 낡고 비좁고 뻐걱거리는 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들어간 그 법당의 풍경도 쓸쓸했다. 그 젊은 청년이 이제 노년의 얼굴로 웃고 계신다. 여하튼.  

즉문즉설은 남편 문제, 자식 문제, 고부 갈등, 직장 갈등, 돈 문제 등을 스님께 풀어놓는 것으로 시작된다. 가령 이런 내용이다. 남편이 거의 매일 술을 퍼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오고, 잔소리도 심하다. ‘나쁜 남편때문에’ 고민인 여성에게, 스님은 남편이 당신에게는 나쁠지 모르지만 술집 주인에게도 나쁠까? 하고 묻는다. “단골손님이고, 술을 많이 팔아주니까 술집 주인에게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는 답변이 유도된다. 술 먹고 늦게 들어오는 그 행위만 놓고 보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내가 그걸 나쁘게 보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늦게라도 들어오니 감사하지 않은가? 숫제 안 들어오는 남편도 있지 않은가? 남편이 돈은 벌어다 주는가? 묻고, 생활비는 잘 준다고 하면, 그런 남편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남편이 당장 죽어버리면 어떻겠냐? 라고 묻는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을 위무(慰撫)하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다. 전혀 다른 시선으로, 또는 더 나쁜 패를 보여주면서, 당사자를 머쓱하게 한다. 스님의 답변을 듣고 나면 그 정도 고민은 아무 문제도 아니네, 싶은 것이다. 

이런 내용도 있다. 어느 종가댁 여인은 도와달라는 일가친척들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러면 스님은 시원한 처방을 내린다. 안 도와줘도 되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묘책인가? 물으면, 당신 남편 사업이 폭망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바탕 웃게 된다. 말인즉 도와줄 여력이 있는 걸 감사히 여기며 기쁘게 살라는 주문이다.

결혼한 지 한 달 남짓의 남성이 말했다. 대한민국의 35세된 건강한 남성으로 얼마 전 결혼했다. 신혼여행 가서 천국의 기쁨을 느꼈으며, 행복했다. 그런데 얼마 전 술취한 아내와 다투었다. 밤에 자다가 일어나보니 아내는 목을 매달고 자살을 했다. 아마 술기운에 그렇게 한 것 같다. 충격이 너무 커서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살고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괴로움이 가시지 않아서 스님의 즉문즉설에 참여하게 됐다. 어떻게 해야 할까? 

가벼운 사랑싸움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스님은 이 남성에게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은 힘들지만 한 3년 지나면 조금 나아질 거 같은가? 라고 물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남성은 그럴 것 같다고 했다. 스님은 1년 후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거고, 2년 후엔 좀 더, 3년 후엔 좀 더 나아질 거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물론 3년이 지나도, 10년이 흘러도 고통이 더 심해지는 경우도 드물게 있지만, 이런 경우는 정신병에 속한다고 했다. 이런 경우는 병원 가서 약을 처방받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회복된다는 설명이다. 남성은 머뭇거렸지만 스님의 말에 동의했다. 

즉 3년이 지나면 지금보다 마음이 좀 안정될 것이다, 그땐 다른 여자를 만날 엄두도 낼 것이다, 그땐 새로운 직장도 알아볼 것이다, 그땐 지금보다는 회복될 것이다, 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때 스님이 한마디 한다. 어차피 3년 지나면 잊고, 다른 직장 알아보고, 다른 여자도 만날 텐데, 꼭 3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겠나? 꼭 3년 동안 아파할 필요가 있겠나?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라고 조언한다. 사람들은 와락 웃는다. 3년 후에 행복해지려 하지 말고, 지금 당장 행복하라는 것이다. 왜 3년 동안 애써 괴로워해야 하나? 지금 당장 다른 여자 만나고 행복해지라. 3년 후에 행복하기 위해 3년동안 고통받고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떠난 사람은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미안해 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그의 길을 간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그런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누구나 당장 행복해지고 싶지만 안되는 것이 문제다. 그러니 되게 해야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오늘 열심히 사는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틀렸다. 행복한 미래 따위는 없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것, 지금 당장 행복할 능력을 키우고 행복한 것이 필요하다. 문제는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전면적으로 변해야 가능한 일이다. 신체와 사유가 변해야 가능한 사건이다. 삶의 달인이 되는 경지일지 모른다. 존재의 밑바닥에 흐르는 해묵은 힘들의 배치를 바꾸고, 기운의 장(場)을 바꾸기, 그런데 이게 어렵다. 행복해지려는 생각만으로 감정과 신체가 변하지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이편에 있던 종래의 삶이, 즉시 저편으로 날아가버리는 도약의 순간이다. 몸을 괴롭히는 영혼(정신)이라는 감옥을 즉시 탈출하는 순간. 존재의 비약이 이루어지는 순간, 차이 나는 내가 생성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어떻게? 거창한 묘수는 없다. 느리게, 천천히 사소한 행동을 바꾸는 실천을 해야 할 뿐이다. 가령, 죽은 아내 때문에 괴롭지만, 우선 방 청소를 시작하는 것도 좋다. 그러니까 괴로워서 자포자기했던 행위들에서 조금씩 해방되는 것이 필요하다. 행위를 매일매일 조금씩 바꾸면, 생각도 바뀌고, 몸의 감각도 바뀐다. 다른 실천들이 모이면 습관이 바뀐다. 업(業)이 바뀌고 업장이 소멸되기도 한다. 정신(생각)이라는 감옥이 나를 괴롭힐 때, 아무리 다르게 의미부여하고 다르게 생각하려 해도 안 될 때, 어제했던 바로 그 행동과 다른 행동들을 시작하라. 이것은 매일매일 더 가벼워지는 연습이기도 하다. 도약이란 이런 작은 실천들이 모였을 때 가능하다. 작은 변화의 순간들이 모여 불현듯 나는 다른 지점에 존재하게 된다. 이제 괴롭지 않다! 

그래서 스님은 지금 당장 여자를 만나고, 일도 시작하라고 주문하는 것일 테다. 나는 덧붙여서 지금 당장 맛있는 것도 먹고, 지금 당장 일상의 습관을 모조리 바꾸는 거대한 변화를 시작하시라, 고 주문하고 싶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려면 지금 당장 당신의 습관을 바꾸는 실험을 시작하라고. 이 시도가, 불현듯 새로운 손님을 모셔 올 것이다. 행복이라는 손님을.  

스님은 종종 남편을 잃은 보살님들이 통곡하는 순간을 함께 하기도 한다. 그런데 울면서 이들이 하는 말은, “스님 이제 나는 어떻게 살까요?”라고 한다. 그러니까 죽은 남편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기 자신의 살 걱정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는 설명이다. 남편의 사라짐 자체를 슬퍼하는 것보다, 그의 부재가 내게 가져올 손해를 괴로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장 행복해지기는 그의 부재가, 이후 내게 가져올 손해에 대한 두려움의 고통에서 당장 해방되기가 된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술통을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지 않는가? 문상 온 친구 혜시가 연유를 물으니 “아내는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누워있는 것이니 슬퍼할 일이 아니다”라고 답변한다. 인간의 몸이란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 않은가? 자기의 본향으로 돌아간 것은, 슬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장자는 이미 저편으로 사라진 저편의 존재다! 그는 즉시 깨닫고 즉시 노래하는 현자다. 

지금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가? 참을 수 없는 모욕감을 느끼는가? 누군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가?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가? 세상이 원망스러운가? 당신의 부모에 대한 원망이 심한가? 열패감에 시달리는가? 인간에 대해 절망하는가? 해답은 하나다. 당장 행복해지자. 당장 그 사태에서 빠져나와 해방되자. 다 내가 만든 감옥이다! 행동을 바꾸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감옥 안에 머물면서 끙끙대는 것은 나의 무능력을 웅변하는 것일 뿐이다. 에이 상황이, 객관적으로 행복할 수 없는데,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는데, 배가 고픈데, 어떻게 행복해지나요? 그래도 행복해질 수 있다! 만약 더 큰 가치를 위해 고통을 기꺼이 감당한다면 그런 행위도 행복이다! 그 고통이 그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행복해지기는 ‘배부르고 등 따순 행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을 행복으로 번역하고, 행복들을 창조하는 능력, 행복들을 창조하고 발명하기 위해 고통들을 건너가는 능력, 이것이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이다. 행복이란 변화를 창조하고 다르게 사는 힘이다. 가볍게, 명랑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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