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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재 2회] 러시아 동방 진출의 상징 시베리아 횡단열차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공한 니콜라이 2세, 볼세비키 혁명으로 온 가족 처형 당해

  • 기사입력 2022.01.14 18:01
  • 기자명 이정식 작가

◉ 유럽풍 건물이 많은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

블라디보스토크는 해안가 언덕에 세워진 도시다. 중국 영토였던 블라디보스토크가 중.러 조약으로 러시아에 귀속된 것은 1860년대. 과거 중국명은 해삼위(海參威)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이후 러시아 극동함대의 거점으로 러시아 태평양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군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구소련 시절인 1958년부터 1991년까지는 외국인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해 당시엔 소련 국적을 가진 사람들만 블라디보스토크에 드나들 수 있었다.

현재 인구는 약 70만 명. 연평균 기온은 4.3℃, 1월의 평균 최저/최고 기온은 영하 16.3/영하 8.8℃, 2월 평균 최저/최고 기온은 영하 13.7/영하 5.9℃이며, 여름인 7월의 평균 최저/최고 기온은 15/21℃, 8월은 17/23℃다.

가장 높은 언덕이자 중요한 관광 코스인 독수리 전망대(후니쿨로르, 독수리 둥지란 뜻, 해발 약 240m)에서 내려다보면 도시와 항구, 금각만대교 등 블라디보스토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바로 아래 기념품 가게 옆에는 러시아의 상징적인 공예품인 붉은색 마트료시카 인형이 대형 풍선으로 만들어져 세워져 있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끈다.

이 도시에는 제정러시아 시대부터 지어진 유럽풍의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건물이 많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역인 아담한 블라디보스토크 역도 제정러시아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볼 수 있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통일이 되었거나 남북관계가 좋다면 서울이나 부산에서 기찻길로 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탈 수도 있으련만, 지금은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거나 부산이나 동해 쪽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수밖에 없다.

바이칼 호수에 가기 위해 한국 여행객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 구간은 4,106km로 시베리아 횡단열차 전체의 44%에 해당된다. 시간적으로는 만 3일 조금 더 (약 76시간) 걸린다.

▲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동쪽 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 

◉ 러시아 동방 진출의 상징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념탑

블라디보스토크 역의 플랫폼으로 내려가면 과거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힘차게 끌던 검정색 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앞에 ‘9288’이라는 숫자가 크게 새겨진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념탑이 서 있다. 이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의 거리 9,288km를 나타내는 상징물이다. 1891년 5월 31일, 니콜라이 황태자가 기공식을 주관한 장소에 세운 것이다.

▲ 블라디보스토크 역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념탑  

니콜라이 황태자는 1894년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어 니콜라이 2세 황제가 된 후 1,2차에 걸친 대공사 끝에 1916년 마침내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완공한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인 1917년에 일어난 2월 혁명으로 폐위되었다. 그 후 우랄산맥 인근 예카테린부르크의 한 저택에 연금됐다가 1918년 7월 볼셰비키 혁명 세력에 의해 가족(알렉산드라 황후와 1남 4녀)을 물론 하인들도 함께 처형당해 불태워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은 2000년 8월,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추존되었다. 횡단열차는 니콜라이 황태자가 서 있던 그곳, 시베리아 횡단열차 기념탑이 있는 플랫폼에서 출발한다.

▲ 비참하게 최후를 마친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

◉ 일본에서 암살당할 뻔한 니콜라이 황태자

비운의 황제 니콜라이 2세. 그가 황태자 시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리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기공식까지 가는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당시의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1891년 3월 차르 알렉산드르 3세의 칙령에 의해 착공되었다. 교통장관 세르게이 비테(1849~1915)의 강력한 건의가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비테는 다음 해인 1892년 재무장관이 되고 1905년 러시아 최초의 수상에까지 오른 탁월한 인물이었다.

황제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중요성을 감안해 기공식에 니콜라이 황태자를 보내기로 했다. 칙령은 3월에 공포되었으나 황태자는 칙령이 공포되기 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황태자는 당시 23세였다.

황태자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경로도 흥미롭다. 육로로 가지 않고 유럽을 거쳐 바다를 빙 둘러 갔다. 황태자 일행은 오스트리아를 거쳐 그리스로 가서 러시아 군함 아조바호를 타고 인도양을 지나 홍콩, 일본에 들렀다.

그런데 니콜라이 황태자의 일본 체류 중 황태자 암살 기도 사건이 발생했다(오쓰 사건). 1891년 5월 11일 니콜라이 황태자가 교토 인근 관광 명소인 비와 호수를 구경한 후 인력거를 타고 오쓰시를 지나던 중 황태자의 경호를 담당하고 있던 쓰다 산조란 순사가 황태자에게 칼을 휘둘렀다.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황태자는 오른쪽 머리에 9cm 정도의 상처를 입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범행 동기는 “일본을 방문했으면 먼저 천황을 배알하는 것이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무엄하게 제멋대로 일본 국내를 여행하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 한 일본 여인, “죽음으로 사죄한다”며 자살

이 사건이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고 대국인 러시아가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을 우려한 일본의 메이지 천황은 직접 교토호텔로 찾아가 황태자를 병문안했다. 이어 나중에는 “납치될 우려가 있다”는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베 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에 올라가 황태자를 위로하는 등 황태자가 일본을 떠날 때까지 최대한의 예우를 했다. 일본 내에서는 신사, 사원, 교회 등에서 황태자의 회복을 위한 기도회를 여는 등 러시아의 눈치를 보느라 전 일본이 전전긍긍했다. 그러던 중 5월 20일 교토에 사는 한 일본 여인이 “부끄러운 일본인을 대신해 죽음으로 사죄한다”며 교토 부청 앞에서 면도칼로 자살을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녀는 열녀(烈女)로 칭송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쓰다는 무기징역형을 받았다.

황태자는 1891년 5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행된 착공미사와 기공식을 마친 후 마차로 약 3개월간 긴 시베리아 육로 여행을 한 끝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황궁으로 돌아갔다.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사이, 모스크바에서 동쪽 우랄 지역의 첼랴빈스크까지는 이미 철도가 부설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891년부터 시작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은 우랄 지역에서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구간의 공사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당초에 설계할 때는 현재와 같은 노선이었다. 그런데 동쪽 끝의 아무르 강을 건너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는 ‘아무르 철도 공구’의 공사는 너무나 험난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말할 것도 없고 한여름에도 겨우 지표면만 녹는 동토지대인 데다 봄이면 아무르 강의 범람 등으로 노반 건설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한 때에 마침 1895년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허약 체질을 그대로 드러냈다. 일본은 승리의 대가로 청으로부터 요동(랴오둥)반도와 대만(타이완), 팽호(펑후)제도를 얻어냈다. 또한 청으로 하여금 조선의 독립을 인정토록 했다(1895년 4월 시모노세키조약). 일본의 속내는 딴 데 있었으나 겉으로는 이같이 조선의 독립이란 내용을 담아 일단 청을 조선에서 배제시켰다.

◉ 삼국간섭 후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프랑스와 함께 ‘일본의 요동반도 소유는 청국의 수도를 위태롭게 할 우려가 있고, 조선의 독립까지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극동의 평화에 장애를 주는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요동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종용했다(삼국간섭).

러시아는 군함을 일본 고베 앞까지 보내 시위를 하기도 했다. 기세에 밀린 일본은 결국 세 강대국의 간섭에 굴복해 요동반도를 내놓는 굴욕을 당했다(1895년 5월). 러일전쟁의 싹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몇 달 뒤, 그해 8월에 조선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바로 이러한 국제 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의 정치에 본격적으로 간섭하면서 조선을 차지하려는 속셈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일본의 고압적 태도에 치를 떨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삼국간섭 이후 일본을 굴복시킨 러시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명성황후는 러시아 공사 베베르 등을 자주 만나며 러시아로 하여금 일본을 견제토록 유도했다.

일본은 이에 대한 앙갚음으로 친러 정책을 주도하는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민다. 마침내 일본은 일본군과 불량배나 다름없는 낭인(유랑 무사 계급)들을 동원해 조선의 황후를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고는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권력다툼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거짓 선전을 했다.

▲ 하얼빈 역의 안중근 의사 의거 장소. 플랫폼 위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치한 사건 발생지>라는표지가 붙어 있다.

◉ 안중근, 명성황후 시해의 주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

러시아는 삼국간섭 이듬해인 1896년, 이 간섭의 보상으로 청나라로부터 치타에서 만주 지역을 관통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얻어냈다. 모스크바에서 가장 빠르게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갈 수 있는, 당초의 노선보다 700km나 줄어든 지름길을 확보한 셈이다.

동청철도 기공식은 1898년 하얼빈에서 있었다. 명성황후 시해 3년 후다.동청철도는 착공 5년 만인 1903년 개통되었다.러시아가 동청철도 부설권을 갖게 되면서 하바롭스크 등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결되는 당초의 ‘아무르 철도 공구’ 건설 계획은 잠정 중단되었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 패배 후 러시아는 지름길 철도를 일본에 뺏길 수도 있다고 우려해 당초 설계대로 치타에서 러시아 영토 내로만 가는 아무르 공구 건설을 다시 시작했다. 그것이 현재의 시베리아 횡단철도 노선이다.

러시아는 삼국간섭으로 만주 지역을 관통하는 철도 부설권을 얻었으나 그사이 조선에서는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원통하고 비참한 죽음을 당했으니, 이때 조선은 이미 나라의 힘과 체통을 잃은 상태였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으킨 주범은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공사였으며 그를 임명한 자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였다.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가 시해 사건의 실제 주범인 것이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처형한 안중근 의사는 재판에서 “나는 개인 자격으로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국제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라고 말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5개를 지적했다. 그 첫째가 대한제국 황후폐하를 시해한 죄요, 둘째, 대한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셋째, (을사조약 등) 5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넷째, 무고한 대한인들을 학살한 죄, 다섯째, 국권을 강탈한 죄 등이라고 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격살(擊殺, 무기로 쳐서 죽임)은 명성황후가 비명에 세상을 떠난 지 14년 만의 응징이었다.

▲ 시베리아 설원, 자작나무 숲 앞의 말들  

◉ 시베리아의 날씨

시베리아 횡단열차 겨울 여행의 가장 큰 관심사는 역시 날씨다. 얼마나 추울까? 모든 여행객이 추위에 대해 무척 걱정하지만, 여행 중 추위 때문에 고생했다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기온이 낮지만 습도도 낮고 바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겨울옷을 제대로 차려입으면 오들오들 떨 일은 별로 없다. 대개의 여행 일정은 추위 속에 오랫동안 노출되지 않고 시베리아의 겨울 풍경을 잘 즐기도록 짜여 있다.

시베리아를 북극에 비유하는 등 다소 과장된 내용이 있긴 하지만, 오래전에 나온 러시아 여행 책자(일본 여행 서적을 한글로 번역한 것) 속의 ‘시베리아, 지구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는 극한의 대지’란 다음과 같은 짧은 시베리아 소개도 참고로 읽어볼 만하다.

북극의 겨울은 8시가 지나야 겨우 주위가 밝아지기 때문에 아침이 늦게 시작된다. 영하 40℃ 정도가 되면 공기 속의 작은 수증기가 얼어붙어서 마치 안개가 낀것 같이 되며 한낮이 되어야 태양이 있는 방향을 겨우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런 날에는 바람이 없다. 만일 어떤 영향을 받아 공기가 움직이면 하늘이 신비로운 빛처럼 흔들린다. 이 아름다움은 사진으로 찍을 수 없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극한의 대지 시베리아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후에는 대개 쾌청하게 맑아진다. 양지에서는 슈바(모피 외투)가 땀으로 젖을 정도이다. 그러나 햇빛은 서쪽으로 금방 사라지고 만다. 해가 기울어질 때면 수빙(樹氷, 냉각된 안개가 나뭇가지 등에 하얗게 얼어붙어 있는 것)도, 적설도, 통나무집의 유리창도, 사람의 얼굴도 모두 잠시 동안 진홍빛으로 물든다. 지구의 자전 속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면 다시 기온이 내려간다. 한밤중 문밖에 나가면 사각사각하는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대기 속의 아주 미세한 얼음 결정이 서로 달라붙어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소리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별의 속삭임’이라고 부른다.

시베리아의 여름도 나쁘지는 않다. 곳에 따라서는 6월 말부터 눈이 내리며, 8월 말이면 첫눈을 보게 된다. 그 짧은 2개월 동안 나무와 풀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벌레가 날아다니고 새가 지저귄다. 시냇물이 흐르고 바람이 계절을 생각나게 한다. 시베리아는 소련의 미래라고 말하는데, 시베리아

에는 문명인이 잃어버린 자연이 살아 있다.(《세계를 간다 소련 편》, 중앙일보사, 1990)

현지인들은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시베리아의 여름도 조금씩 길어지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시베리아의 겨울은 11월부터 4월까지이며 평균 기온은 영하 15°C이다.

◉ 반팔 옷이 필요한 횡단열차 내부

겨울철,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하면 왼쪽으로 얼어붙은 바다가 보인다. 아무르 만이다. 일제 때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갔던 이광수가 말한 ‘밀정을 죽여 달구지에 싣고 나가 얼음 구멍에 집어넣었다’는 그 얼음 바다다. 얼어붙은 바다 위로 차량이 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 침대칸 쿠페 내부 

열차의 객실은 보통 세 등급으로 나뉜다. 비행기를 타면 퍼스트 클래스, 비즈니스 클래스, 이코노미 클래스로 나뉘는 격이다. 객실에 침대가 2개 있는 일등실 룩스, 2층 구조로 침대가 4개 있는 쿠페, 그리고 침대가 6개라고는 하나 밀폐형이 아니고 오픈되어 있는 플라츠카르타플(라취)라는 3등칸이 있다.

객실의 2층 침대를 오르내리는 일이 젊은이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연세 든 분들에겐 쉽지 않다는 것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1층 침대를 위로 젖히면 침대 아래에 가방을 넣을 수 있는 공간이

▲ 작가 이정식 

나온다. 2층 출입문 위에는 다락이 있어 큰 가방은 그곳에 넣으면 된다. 침대 사이에는 작은 탁자가 하나있다. 겨울철의 바깥 온도는 곳에 따라 영하 15°C에서 영하 40°C를 오르내리지만, 열차 안의 온도는 영상 22~26°C를 유지한다. 그래서 객실 안에서 입을 반팔 옷이 필요하다. 밤에는 객실 안의 온도도 낮보다 조금 내려간다.

러시아 열차의 객실은 남녀 구분이 없어 남녀가 같은 객실에서 며칠을 함께 여행하는 어색한 일도 자주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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