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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甲寺

  • 기사입력 2021.12.28 21:36
  • 최종수정 2024.02.03 15:24
  • 기자명 김희재 작가
▲ 김 희 재 (수필가,한국어 교육 전문가)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나오는데 거짓말처럼 함박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푹해서 그런지 눈이 제법 탐스럽게 내리는데도 도로에는 쌓이지 않았다. 문득 ‘눈 오는 날은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라는 옛말이 생각났다. 이런 날엔 산에 가도 춥지 않을 것 같다. 오랜만에 눈이 하얗게 쏟아지는 광경을 보니 내 마음이 겁도 없이 나댄다. 

‘눈 내리는 갑사의 풍경을 찍으려면 오늘이 딱 제격인데....’ 내게 마음의 눈으로 풍경을 찍어보라시던 분의 말씀도 떠올랐다. 남편에게 갑사로 가자고 하니까 선선히 핸들을 꺾었다. 눈이 오는 날, 길 미끄럽다고 서둘러 집으로 가지 않고 길을 나서 본 것도 오랜만이다. 

  동학사 입구를 지나자 눈이 그쳤다. 괜히 나섰다 싶은 후회도 잠깐, 갑사 일주문 앞에 다다르자 다시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화려했던 단풍잎을 다 떨어내 버린 앙상한 가지 위에 폭신한 흰 목화솜이 한 꺼풀씩 덧입혀지고 있었다. 지난봄에 왔을 땐 노랑과 연두의 향연을 연출하던 황매화 가지에도 눈꽃이 하얗게 피어났다. 반가운 마음에 나무 흉내를 내 보았다. 두 팔을 벌리고 눈을 맞으니 내가 도로 아홉 살 아이가 된 기분이다. 아침 내내 공들여 매만진 머리에 눈이 쌓이는데도 나는 우산을 찾거나 길을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길옆에 늘어선 나무들 이름표까지 유심히 들여다보며 천천히 걸었다. 그동안 갑사를 많이 찾아왔지만 이렇게 함박눈을 맞으며 걸어보는 것은 처음이다. 

  산사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처럼 아무 장비 없이 온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들 단단히 중무장하고 왔다. 우리는 허위허위 올라가는데, 그들은 부지런히 산에서 내려오고 있다. 하기야 오후 세 시가 넘었으니 겨울 산을 오를 시간은 아니다. 눈발이 점점 거세어지니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더욱 부산해 보였다. 우리도 금잔디고개로 향하려던 발길을 돌려 대웅전 옆 계곡에 있는 전통찻집으로 향했다. 

  찻집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예 영업을 접은 것 같았다. 이 찻집은 조선의 마지막 왕후인 순정효황후 윤 씨(순종의 두 번째 부인)의 중부(둘째 큰아버지) 윤덕영의 별장이었던 기와집을 개조한 것이었다. 시내에 있는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고즈넉함이 좋아서 나는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오곤 했다. 특히 탁자에 놓인 굵은 양초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제 몸을 불사르는 것이 좋았다. 촛불을 앞에 두고 감초 향이 진한 한방차를 한 모금 마시면 따뜻한 기운이 온몸에 확 퍼졌다. 그러면 마음도 자연스레 풀어지곤 했다. 

  지난 20년 동안, 나는 귀한 손님을 접대할 일이 있으면 이곳으로 모시고 오곤 했다. 간혹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답답할 때나, 사춘기를 지나는 아이들과 진솔한 대화가 필요할 때도 찾아왔다. 더러 마음이 몹시 울적한 날엔 혼자 오기도 했다. 어떤 마음으로 찾아오든 여일하게 반겨주는 계곡의 풍광이 편해서 정말 좋았다. 특히 창을 바라보고 나란히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을 가장 좋아했다.

  찻집 주인은 꽁지머리를 길게 묶고 수염까지 덥수룩하게 기른 노총각이었다. 그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눈썰미가 있어서 단골손님의 취향도 잘 파악했다. 꽁지머리 총각은 내가 문에 딱 들어서면 얼른 일어나 창가 자리로 안내하곤 했다. 주인장이 직접 끓여내는 차의 맛과 향도 일품이었다. 장사도 제법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왜 그만두었을까? 

  간판을 떼어내고 나니 여기가 찻집이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겠다. 그저 작은 기와집 한 채가 쇠락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나는 너무 서운해서 발길을 쉬 돌릴 수가 없다. 기쁘고 슬펐던 날들의 기억마저 완전히 소멸해버린 것만 같다. 내 젊은 날의 소중한 보물 하나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내 소유인 적은 없었지만 내 것이었던 닫힌 문 앞에서 오랫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함박눈이 점점 더 굵어졌다.

  찻집 앞에 있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휘돌아 가면 자그마한 선방이 나온다. 그 앞에는 원숭이도 오르다 떨어진다는 배롱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여기에 올 때마다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매끈한 나무껍질을 손으로 쓸어보곤 했다. 워낙 나뭇결이 단단해서 마디게 자라는 나무가 이만큼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을까.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치켜세우지만, 어찌 보면 나무만도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은 한번 빠듯이 살고 돌아가면 다시 오지 못하지만, 나무는 수 없는 세월을 거뜬히 이긴다. 완전히 죽은 듯이 앙상해져 있다가도 봄이 되면 보란 듯이 회생하여 새로운 시절을 다시 사니 말이다. 

  선방에서 갑사의 보물인 철 당간 지주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능선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가야 한다. 사시사철 푸른 터널을 이루었던 대숲 길도 예전 같지가 않다. 대나무를 거의 다 베어내고 길을 넓혔다. 그래도 가파른 길이라 한달음에 내려가기는 버겁다. 

  눈발은 어느새 물기가 많은 싸라기로 변하여 갔다. 나는 행여 미끄러질세라 그의 손을 꼭 잡고 조심조심 대나무 길을 내려왔다. 하산 길 내내 그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언 손에 내 온기가 전해지니 오히려 내 마음에 훈기가 더 그득하다. 

  함박눈은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다. 말갛게 씻긴 해가 어느새 산등성이로 넘어가고 있다. 돌아오는 길은 이미 보송하니 말랐는데, 내 마음에는 여전히 눈이 소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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