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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담

  • 기사입력 2021.12.27 08:55
  • 기자명 이희영
▲ 수필가,방산 이 희 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상도 많이 변했다. 내가 어려서 어머니한테 많이 듣던 말이 사내가 시장바구니 들고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에 대한 바람도 시간의 흐름 속에 다 묻혀버렸다. 어머니의 당부를 거역하며 불효막심한 아들이 되어 오늘도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 슈퍼를 찾았다. 이런 일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지는 벌써 십수 년이 지난 오랜 일이다.

세상이 바뀌니 사람들의 생각도 다 바뀌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미성년자가 있으면 어른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호되게 나무랐다. 또 학생들이 서로 싸우거나 심하게 폭행을 가하는 것을 보면 싸우지 말라고 타이르기도 했다. 

요즘은 어떤가? 남여를 가리지 않고 길거리에서 가래침을 뱉으며 담배를 피워대도 누구 하나 말하는 사람이 없다. 더욱이 청소년 사이에서 폭행이 일어나거나 여성에 대한 성추행이 벌어져도 제지하기는커녕 본체만체한다. 괜히 끼어들었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찰에 신고하려 해도 나중에 증인이나 목격자가 되어 경찰로부터 조사한다며 오라가라 하면 귀찮아지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의 이득과 관계없는 일에 대해선 간섭하지도 않고, 누구도 간섭을 받으려 하지 않는 극도의 개인주의가 만연해서 그럴 것이다. 

나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장바구니를 들고 동네에서 제법 큰 슈퍼를 찾았다. 장내로 들어가려는 순간 “사람 살려주세요”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어떤 60세 정도의 할머니가 헐레벌떡 도망가며 외치는 소리다. 그 뒤로는 30대 중반 정도의 여자가 죽일 듯이 쫓아가는 상황이었다. 

겁에 잔뜩 질린 할머니는 계산대와 장내를 뱅뱅 돌며 “저 여자가 나를 죽이려 해요! 무서워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라며 도망 다니고 있었다. 뒤쫓는 젊은 여성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눈알이 파랗게 변하여 무척 흥분된 모습이었다. 그렇게 장내를 세 바퀴를 도는 동안에도 누구 하나 말려주는 사람이 없이 모두들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마침, 그들이 내 근처로 뛰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나는 살기등등한 젊은 여자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얼굴이 창백해서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너는 뭐야! 비켜 새끼야!”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지 저에게 말해주세요” 

“필요 없어 새끼야!” 

내가 세상 살면서 새끼 소리를 한두 번 들어본 것도 아닌데 극도로 흥분한 여자에게 들은 새끼 소리는 욕도 아니다. 다시 말했다. 

“저 여자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게 말해주면 내가 잡아서 해결해주겠다.” 그 말은 듣는 여자의 눈빛이 사뭇 누그러졌다. 

“저 여자가 내 팔을 쳐서 내 팔이 부러졌다고요”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그랬군요, 많이 아프시겠네요” 

“네” 

이쯤 되면 반은 성공이다. “그럼 내가 저 여자를 잡아서 올 테니 저쪽 의자에 가서 기다리세요” 파랗게 질렸던 그 여자의 눈빛도 차츰 검은색으로 돌아왔고 창백하던 얼굴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더니 잠자코 의자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끝난 거다. 상황이 종료되자 웬 박수 소리가 들렸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어휴 대단한 분이네!” 하며 절로 치는 박수였다. 어쨌든 또 한 사람을 살렸다는 뿌듯함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으며 아내에게 오늘 슈퍼에서 생긴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눈이 둥그렇게 뜨고 내 말을 흥미 있다는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말을 다 마친 나에게 아내는 말했다.

“잘하긴 했는데 다음부터는 절대 끼어들지 마!”

아이고! 내가 장도 봐주고 나름 의로운 일을 해서 칭찬받을 줄 알았더니 고작 들은 말이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말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 아내의 생각마저도 다 변해버렸나 싶다. 

내 생각으론 내가 오늘 경험한 무용담은 분명 무용담(武勇談)일진대 아내가 볼 때는 무용담(武勇談)은커녕 그냥 일개 필부의 무용담(無勇談)인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한데, 변해 버린 세상인심을 원망해야 하나? 남편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집사람의 개인주의를 탓해야 하나? 그래도 남들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해결해주니 그에 대해 칭찬의 박수를 쳐주었던 사람들이 있기에 세상은 희망이 있고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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