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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호미

  • 기사입력 2021.12.26 22:24
  • 기자명 이오장
▲ 시인 이오장 

낡은 호미

 

                                                        곽진구

 

 

장에서 횡재한 낡은 호미에서 사람의 소리가 났다

 

봄꽃이 핀 이후에는

때도 없이 그 소리가 꽃밭에서 살았지만

꽃이 진 다음부터는 차분히 좌정하고서

창가에 머문 고요의 행세를 마다하지 않았는데

 

그 소리를 따라가 보면

한 집안을 건사하느라 팔순의 나이에도

봄만 오면 어김없이 새순을 들이미는

느티나무 한 그루 같은 여자가 불쑥 튀어나온다

 

농사짓고 바늘질품 팔고 남편 병수발하며

뼈 빠지게 보낸

참, 가지 많은 세월이어서인지

그 세월이 아까워서 그런지

손에 호미를 들고

세상이 슬프다, 슬프다, 이렇게 쓰고 있었다

 

 

호미에서 나는 사람 소리를 어느 누가 알아들을까. 오직 곽진구 시인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다. 산골에서 호미를 들고 자갈밭이나 콩밭을 긁어보지 않은 사람은 호미 소리는 고사하고 쟁기질 소리도 못 알아듣는다.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 메마른 콩 포기를 적실 때면 소나기 온 듯해도 무시해 버리고 말없이 잡풀을 긁으며 허리를 땅에 뉘었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 지금은 어디에서 놓지 않았던 호미를 찾고 있을까. 호미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농기구다. 농기구를 떠나 아낙네의 손에서 춤추고 산골을 오를 땐 지팡이 짚고 가듯 손에서 놓지 않았고 논밭에 나가지 않을 때는 정지간 앞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지금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화초 가꾸기에 적합하다는 판단 아래 많은 양이 수출 되는 특수한 농기구 호미,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그런 호미를 추억 속에 간직한 게 아니라 우연히 만났다. 호미의 정서를 알지 못했다면 만나지 못했을 우연이다. 봄부터 가을 수확이 끝날 때까지 어느 할머니의 손에 들려 밭을 일구고 살림살이를 늘려가며 식구들을 봉양했을 호미, 시골 장 구석에서 뒹굴다가 아무도 알아보지 않았는데 곽진구 시인의 눈에 들어 슬픔의 소리를 냈다. 시인과 호미의 만남이 장터를 울리고 전 국민을 울리는 장이 된 것이다. 농사짓고 바느질품 팔며 병든 남편을 수발하던 어느 아낙네의 슬픈 생이 낡은 호미에서 되살아나 잊혀가는 우리 농경생활의 전모를 밝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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