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 대한 주류 학계의 학설을 부정하는 학설

한민족 DNA를 찾아서(24회)

김석동 | 기사입력 2021/11/07 [18:35]
> 한민족 DNA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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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에 대한 주류 학계의 학설을 부정하는 학설
한민족 DNA를 찾아서(24회)
 
김석동   기사입력  2021/11/07 [18:35]

 

▲ 필자 김석동


그동안 통용되어온 주류 사학계의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시각과 전혀 다른 논리를 전개해온 연구들이 있다.단재 신채호 선생은 1931년에 저술한 《조선상고사》에서 단군왕검의 년대를 기원전 2천년 이전으로 기술한다.

 

“‘乃往二千載, 有檀君王儉, 立都阿斯達(내왕이천재, 유단군왕검, 립도아사달: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이라고 하였으므로, 고구려 건국 이전 2000년이 단군왕검의 원년元年이고, 삼국 시대 중엽까지도 ‘신수두’를 신봉하여 단군이 거의 정치상 반半 주권을 가져서 그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가 2천 몇백 년은 될 것이니, 어찌 1000년만으로 계산하겠는가.”

 

영역과 관련해서는 고조선에는 3인의 대단군이 있어 대왕大王인 ‘신한’은 하얼빈을 중심으로 만주 지역, 부왕副王인 ‘말한’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 또다른 부왕인 ‘불한’은 개평을 중심으로 발해만 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신·말·불 세 한이 삼경에 나뉘어 주재하면서 조선을 통합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대단군의 삼경三京은, 그 하나는 지금의 하얼빈哈爾濱이니, 고사古史에 부소갑扶蘇岬 혹은 비서갑非西岬 혹은 아사달阿斯達로 기록된 곳이며, 그 둘은 지금의 해성海城·개평蓋平 등지로서 고사에 오덕지五德地 혹은 오비지五備旨 혹은 안지홀安地忽 혹은 안시성安市城으로 기록된 곳이며, 그 셋은 지금의 평양平壤이니, 고사에 백아강百牙岡 혹은 낙랑樂浪 혹은 평원平原 혹은 평양平壤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한편, 기원전 10세기경부터 대략 500~600년 동안은 대단군 조선의 전성 시대였으며 기원전 4세기경에 삼조선으로 분립되었다 한다. “삼조선三朝鮮은 곧 세 ‘한’이 분립한 뒤에 서로 구별하기 위하여 ‘신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신朝鮮’이라 하였고, ‘말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말朝鮮’이라 하였으며, ‘불한’이 통치하는 지역은 ‘불朝鮮’이라 하였던 것이다.”, 

 

“삼조선三朝鮮이 분립하기 이전에는 ‘신한’이 전 조선을 통치하는 대왕大王이 되고 ‘말’·‘불’ 양 ‘한’은 그 부왕副王이었으므로, ‘신한’이 ‘아스라’에 주재할 때에는 ‘말’·‘불’ 양 ‘한’의 둘 중 하나는 ‘펴라’에, 다른 하나는 ‘아리티’에 머물러 있으면서 지키고, ‘신한’이 ‘아리티’나 ‘펴라’에 주재할 때에는 ‘말’·‘불’ 양 ‘한’은 또 다른 두 서울京에 나뉘어 머물러 있으면서 지켰다.”, “그러면 무엇에 근거하여, 저들의 기록에 보이는 조선朝鮮들을 가지고 이것이 ‘신朝鮮’이니 ‘말朝鮮’이니 ‘불朝鮮’이니 하는 구별을 하는가? 《사기》 조선전에는, 위만이 차지한 ‘불朝鮮’만을 ‘조선’이라 쓰고, ‘신朝鮮’은 ‘동호東胡’라 칭하여 흉노전에 넣었으니, 이제 《사기》 흉노전에서 ‘신조선’의 유사遺事를, 조선전에서 ‘불조선’의 유사를 주워오고, 《위략》이나 《삼국지》의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록을 교정校正하여 이를 보충하고, ‘말朝鮮’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사의 붓 끝에 오른 적은 적으나 마한馬韓·백제의 선대先代는 곧 ‘말조선’ 말엽의 왕조이니, 이로써 ‘삼조선三朝鮮’이 나뉘어 갈라진 역사의 대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원전 4세기경에 ‘신·말·불’ 삼조선이 분립한 것이다. 

 

‘신朝鮮’은 성姓이 해씨解氏이니, 대단군大壇君 왕검王儉의 자손이라 불리는 자이며, ‘불朝鮮’은 성姓이 기씨箕氏이니, 기자箕子의 자손이라 불리는 자이며, ‘말朝鮮’은 성姓이 한씨韓氏이니…”

 

이상과 같이 단재 선생은 고조선 연대에 대해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연대를 인정하고 고조선의 영역은 만주, 한반도, 요동 및 요서 지역에 걸친 대제국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의 역사학자 리지린은 1962년 《고조선연구》를 저술하여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중국의 고대문헌 등을 고증하여 고조선의 위치를 설명한다.

 

 

 

“《관자》에서 기원전 7세기경 고조선의 령역은 의무려산(오늘의 료서지역) 좌우에 걸쳐 있었다고 주장할 근거가 있게 된다.”, “중국의 가장 오랜 지리 서적인 《산해경》은 고조선의 위치를 조선 반도 내에서 찾을 수 없으며 발해 연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전국책》 자료에 의하면 고조선 령역은 오늘의 우리나라 령역으로 될 수 없으며 대체로 오늘의 료동과 료서에 걸치는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는 바 … 사마천도 고조선을 오늘의 우리나라 영역으로 본 것이 아니라 료동과 료서에 걸치는 지역으로 인정했다고 우리는 해석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전국 시대의 중국 문헌, 자료는 우리에게 고조선 령역을 압록강 이북에서 찾아야 할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다.” 또한 그는 《사기·조선렬전》, 《한서·조선렬전》, 《삼국지·위지 동이전》 등을 보더라도 고조선이 오늘날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주장할 근거가 없다고 한다. 한편 당대 이후 정사들에서는 대체로 고조선이 오늘의 우리나라 영역(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후대의 요사(遼史)는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의 요동으로 기록하고 있고 청조 건륭 시대 사가들은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의 위치를 오늘의 요동으로 인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구당서》 199권, 《후한서》 1권, 《성경통지》 10권, 《만주원류고》 2권 등). 이후 연나라의 장군 진개의 침략 등으로 고조선의 영역도 기원전 3세기 초에 대변동이 있었다 한다.

 

구소련 과학아카데미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은 1982년 러시아판 《고조선-역사·고고학적 개요》를 출간했다. 그는 중국 사서 등을 분석하여 고조선의 영역을 밝히고 있다

 

“패수는 한대에 조선과 옌(燕: 필자 주)의 경계가 되는 강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친(秦: 필자 주)의 옛 황무지 혹은 버려진 땅이 공식적으로 조선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이러한 기록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단정할 수 있다.

 

① 패수는 한이 한때 옌에 속했던 동쪽의 일부 지역을 포기했던 시기에 조선과 한의 국경이었다. 그리고 만번한은 옌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 조선과 옌의 경계이었다.

② 옌과 치齊의 옛 영지로부터 온 피난민들과 야만인, 즉 조선인들이 거주하였던 친의 옛 영토는 패수의 동쪽에 있었다.

③ 옌을 대신하였던 친의 옛 땅이 패수의 동쪽으로 확장되었기 때문에, 패수는 만번한보다 서쪽에 위치했다.

④ 고조선의 수도(왕검성이 아님)는 한漢 왕조가 열리기 이전에 중국에 속했던 지역에 위치할 수 없다.

⑤ 고조선은 한 왕조 초기에 중국에서 이러난 분쟁을 이용하여 잃어버린 땅의 일부를 회복하였다. 따라서 패수는 기원전 283년의 전쟁 전에는 옌과 조선의 옛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음에 틀

림없다.”

 

또 이어서 “고조선은 확실히 랴오똥 지방의 대부분 지역, 지린古林 지방의 대부분(지린의 서북과 동쪽 지역 제외), 한반도 북부(함경북도의 북쪽 지역과 강원도의 남쪽 지역 제외)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쓰고 있다.

 

한편 고조선의 연대와 관련해서는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기원전 2000년대 후반은 초기 청동기 시대로, 기원전 1000년대 전반은 후기 청동기 시대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후기 청동기 시대에 고대의 역사서에 나오는 고조선 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사서를 연구한 러시아 학자의 고조선 연구에서도 고조선의 영역은 요동·요서 지역, 만주, 한반도 북부 지역을 망라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고조선의 연대도 한국 주류 사학계보다 훨씬 이른 시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유 엠 부찐’은 동 저서에서 여러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고조선 영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전 단국대 윤내현 교수는 1994년에 발표한 《고조선연구》에서 기존의 국내 사학계와는 다른 새로운 고조선 역사를 기술한다.

 

다음은 고조선의 강역과 국경에 대해 밝힌 내용이다. ① 고조선 후기인 서기전 5세기경부터 서기전 2세기경까지의 고조선 서쪽 국경은 지금의 난하灤河와 갈석산碣石山 지역이었으며, 중국에 서한西漢이 건국된 후에는 국경이 서한지역으로 이동되어 확대되었다.② 고조선 전기와 중기의 서쪽 경계와 관련하여서는 서기전 12세기 이전 부터 난하 유역은 고조선의 강역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고조선 초부터 난하 유역은 중국의 강역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며 고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③ 고조선의 연대와 관련하여서는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개국 연대로 기록된 연대는 현재의 고고자료만 가지고도 충분히 성립되며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서기전 2300년보다 내려 오지는 않는다.

 

윤내현 교수는 주류 사학계의 고조선사와 완전히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신채호·리지린·유 엠 부찐의 학설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상반된 한국 고대사의 두 가지 체계가 존재하는 데 대해 《제왕

운기》와 《고려사》의 문헌 기록 때문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따로 소개한다.

 

 

사료 중심의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는 심백강 박사는 고조선 건국 연대와 관련하여 “《산해경》에는 ‘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그 이름을 조선이라 한다’고 하였다. 《산해경》의 이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의 발해만 부근에 있던 고대 국가는 고조선이었다. 《산해경》에서 말한 고조선의 위치와 요서에서 발굴된 하가점하층 문화의 분포 범위가 서로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는 요서 일대에 분포된 하가점하층 문화는 동아시아 문명의 서광인 홍산문화를 이어 4000년 전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건국한 고조선이 남긴 유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타나는 4000년 전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했다는 기록은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하겠다”라고 말했다.

 

또한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해서는 “고조선의 서쪽 강역은 전국 시대 이전에는 산동성 동부 일부와 하북성 서북부, 중남부를 포괄하였다. 연나라의 전성기에 하북성 서북부와 동북부 일부를 상실하였으나 진·한 시대에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서 다시 회복하였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 무제가 논공행상을 할 때 유공자들에게 나누어준 봉지를 보면 압록강 유역의 지명이 아니라 산동성 동부에 있는 지명들이 나타난다. 이는 한나라 때 오늘날 산동성의 동부가 고조선 영토에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하겠다”라고 말했으며, 이어 “근래 비파형 동검의 출토 상황을 살펴보면 산동성 동부, 하북성 서북부, 서남부,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망라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중국의 하북성 보정시 망도에서부터 동쪽으로는 한국의 전라남도 보성군과 경상남도 진주 등지에 이르기까지 실로 한반도, 요동반도, 산동반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비파형 동검의 출토지는 문헌에 기록된 고조선의 강역과 일치하며 고고학적으로 고조선 영토의 범위를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라고 하겠다”라고 했다.

 

그는 연구를 통해 기원전 24세기 고조선 건국이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이며 고조선 영역도 만주, 한반도, 요동 및 요서 지역 일대에까지 이르렀다고 결론을 내렸다

.

한편, 심백강 박사는 현재 북경시 북쪽에 있는 조하潮河는 북송 시대까지 조선하潮鮮河였으며 바로 《사기》 <조선열전>에서 말하는 연나라와 조선의 국경이며 나중에 한나라와 조선의 국경이기도 한 패수浿水를 의미한다고 한다. 고조선의 국경이 북경 인근에 있었다는 의미이다.

 

상명대 박선희 교수는 한국 고대복식연구를 통해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출토된 복식 자료 가운데 출토량이 비교적 풍부한 가락바퀴, 나뭇잎과 원형모양의 장식, 긴 고리모양의 허리띠 장식, 갑편 등이 그 문양이나 양식에서 공통성을 지니면서도 중국이나 북방 지역의 것과 많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찰하였다.” 저자는 복식 재료도 유사하다는 점을 밝히고 같은 복식을 생산하고 사용했던 사람들이 공통의 귀속 의식을 가진 하나의 국가에 속한 주민들이라 보았다.

 

위의 그림은 이 연구 결과, 저자가 확정한 고조선 강역 지도이다.

 

4. 고조선을 보는 두 가지 시각

앞서 본 바와 같이 고조선을 보는 사학계의 입장은 고조선 역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고조선의 강역’과 ‘고조선의 연대’를 보는 시각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고조선 연대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유물·유적 등을 통해 《삼국유사》 등에서 기록한 바대로 기원전 24세기경으로 보는 견해와 기원전 4~5세기경에 성립한 국가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는 시대에 따라 변천했겠으나 고조선이 대동강의 유역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존재하였다고 보는 입장과 한반도, 만주, 요동 및 요서를 포괄하고 있었다는 입장이 명확히 갈라진다. 이러한 견해 차이는 한사군까지 이어져서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도 한반도 존재설, 요서 지역 존재설 등으로 나뉠 수밖에 없게 한다. 이러한 입장 차이의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 윤내현 교수는 《고대문헌에 보이는 한국고대사의 두 가지 체계(고조선 연구 제1호, 2008)》라는 논문을 통해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이 나타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한국 고대사의 두 가지 체계

윤내현 교수는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중심부에 위치하지 않았고 그 서부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달리 《제왕운기》에는 기자조선이 단군조선의 뒤를 이어 그 중심부에 위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라고 했다. 즉,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에 나타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과 중국 문헌에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가지의 체계가 존재하게 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라 ‘고조선(단군조선) → 열국 시대로 이어지는 체계’와 《제왕운기》에 따라 ‘고조선(단군조선, 진조선) → 기자조선(후조선, 준왕) → 위만조선(위만, 우거) → 한사군 → 열국 시대’로 이어지는 체계가 그것이다. 한국 고대사에 대해 완전히 다른 두 역사 체계가 나뉘게 되었으니 둘 중 하나는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체계를 좀 더 살펴보자.

 

② 《삼국유사》-기본 사료 체계

이 체계는 주로 중국 문헌에서 확인되며 《삼국유사》 고조선조 내용과도 같다. 윤내현 교수는 “《삼국유사》와 중국 기록에 나타난 한국 고대사 체계는 고조선이 한반도와 요동·요서 지역을 활동 무대로하여 계속 존속하다가 중앙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여러 나라로 분열되어 열국 시대가 출현한 것이 된다. 그리고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 등은 고조선의 중심부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고조선의 서부 변경邊境 지대, 즉 지금의 요서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로서 이들은 한국사의 주류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한서》, 《진서》 등에서 기자조선이 지금의 하북성 창려현 난하유역의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점 등을 논거로 들었다.

 

 

③ 《제왕운기》-《고려사》 체계

오늘날 통용되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제왕운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앞서 설명한 《삼국유사》-기본 사료 체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의 역사가 전개된다. 오늘날 주류 사학계가 받아들이는 한국 고대사 체계는 단군조선 → 준왕 → 위만조선(위만, 우거) → 한사군 → 열국 시대의 체계인데 앞서 본 《제왕운기》 체계에서 기자조선의 존재만 부인하고 그 자리에 준왕을 대신 등장시켰다.

 

 

윤내현 교수는 중국 문헌에 따르면 《삼국유사》-기본 사료 체계가 명확한데도 불구하고 《제왕운기》와 《고려사》를 통해 기자조선이 한국 고대사 체계에 들어오면서 한국 고대사에 왜곡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한민족 국가인 고조선에 상나라 제후였던 기자가 상이 주에 멸망하자 고조선에 들어와 단군조선을 이어받게 된 것이다. 또 위만이 기자의 후손인 준왕의 정권을 빼앗아 위만조선을 세우고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데 따라 기자조선-위만조선-한사군이 한국 고대사의 주류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역사 체계에서는 고조선(전조선)·기자조선(후조선)·위만조선을 삼조선이라 부르고 지금의 평양이 도읍지였고 한사군도 같은 지역에 있었으며 열국 시대가 그 뒤를 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한국문헌의 한국 고대사 체계가 중국 문헌의 기록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고려 시대에 기자를 고조선의 뒤를 이은 통치자로 잘못 등장시킨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그리고 한사군은 고조선 서부변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으로 한국 고대사의 주류 체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조선의 연대 문제와 강역 문제는 한국 고대사의 핵심이자 기본 골격이다. 앞서 소개한 학자들의 연구와 주장들 외에도 학계에서는 서로 다른 두 입장을 견지하는 깊은 연구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현존하는 한국 및 중국 사서는 물론 한민족 활동 무대였던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대초원의 역사 기록 등 우리 역사와 관련된 수많은 고대 사서를 엄밀하게 재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동북아 일대와 유라시아 대초원 등에서 발굴되어 한민족 고대사를 유추할 수 있는 수많은 고대 유적과 유물 등에 대한 연구와 고증을 통해 우리의 역사를 복원해 나가야 한다. 1960년대 이후 중국의 홍산 지역에서 쏟아져 나와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고 지금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는 고대 유적과 유물들은 앞으로 고조선 역사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다시 논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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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11/07 [18:35]   ⓒ 한국NGO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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