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명승> 포천 화적연(抱川 禾積淵)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 산 115

  • 기사입력 2021.11.07 08:07
  • 기자명 정진해 기자
▲ 화적연 전경  

한탄강을 따라 걸어 자연의 멋을 풍미하면서 계절의 멋을 담아 보았다. 아우라지 베개용암, 비둘기낭 폭포, 멍우리협곡, 교동가마소, 화적연, 대교천 현무암 협곡, 순담계곡, 고석정, 직탕폭포는 용암이 빚은 예술품의 집산지이다. 하나의 강줄기에서 물은 같을 수 있으나 용암의 절경은 긴긴 세월 또 다른 자연의 개체에 의해 다듬어지고 또 다른 작품을 생산해 내는 곳이 한탄강 줄기이다.

한탄강의 발원은 강원도 평강군의 추가령곡이라 한다. 가보지 못하고 갈 수 없는 곳에서 출발한 물줄기는 철원과 포천, 연천을 거쳐 임진강과 합류함으로써 한탄강의 이름은 끝이 난다. 물은 넓은 바다로 가기 위해 흐리고 있지만, 그 물이 잘 내려가도록 길을 만들어 놓은 곳이 한탄강이다.  한탄강 강물은 6·25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다. 강물과 휴전선이 비극적 만남을 이어가듯 같은 선을 따라 흐른다. 한탄이란 말이 절로 나는 강이다. 그러나 한탄강은 ‘한여울’ 즉 큰 여울을 뜻한다. 여울은 수심이 깊은 강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한탄강은 바닥이 얕거나 폭이 좁아 물살이 세게 흐르는 강을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 화적연 전경  

한탄강 강줄기는 선사시대 지구의 단면을 보여준다. 태고의 한탄강 상류 지역에서는 여러 차례 대규모 화산 폭발이 있었다고 한다. 그 폭발로 분출된 용암은 한탄강을 따라 임진강까지 약 110km를 흘러 한탄강 주변을 거대하고 평평한 현무암 용암지대를 만들었다. 이렇게 형성된 용암지대가 식으면서 4~6각형의 현무암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만들어졌다. 주상절리 사이에 오랜 세월 비와 강물이 스며들어 흐르고 풍화와 침식을 거듭하면서 기둥이 떨어져 나가면서 깊은 협곡이 만들어졌고 벽면을 따라 기둥 모양의 현무암 주상절리가 노출되었다. 

유네스코는 한탄강의 현무암 협곡과 용암지대라는 지질학적 특수성, 아름다운 경관을 보존하고 긍정적 활용하고자 하는 주민들의 노력을 인정해 2020년 7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정했다.

한탄강에는  지형의 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붙어진 명소가 곳곳에 있다. 그 중 옛 풍류를 질기던 선비들이 금강산을 오가며 들려 아름다운 경관에 놀라 쉬었다 가던 화적연을 찾았다. 자동차로 387번 도로를 따라 철원으로 다던 길목 포천시 관인면 사정리에 좌회전을 받아 깊숙이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한탄강 강가의 화적연이라는 명소에 도착한다. 도보로 접근을 하려면 영북면 운천리 멍우리협곡에서 자일리 방향의 강변길을 따라 화적연으로 내려서면 반대편을 보는 또 다른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경기도 포천시 영북면 자일리와 관인면 사정리 중간에 위치한 화적연은 현무암 바위로 영평 8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곳으로 물 위를 13m 높이에 달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붙어진 화적연(禾積淵)이다.

▲ 화적연 전경  

영평 8경은 조선 시대 영평현 지역으로 이 지역은 경관이 뛰어나 시인과 문사들이 시와 글을 많이 남긴 곳으로 유명하다. ‘영평’이란 지명은 조선 태조 때인 1394년 영흥현이 영평현으로 개칭되면서 비롯되었다.

영평 8경은 국사봉에서 발원한 산내천과 서쪽으로 흐르는 영평천이 한탄강으로 흘러들면서 우거진 숲, 맑은 물, 기암괴석, 병풍같이 우뚝한 절벽 등의 명승을 자아내어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암(思菴) 박순(朴淳), 미수(眉叟) 허목(許穆),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등 수많은 인물이 이곳을 찾았고, 영의정을 지낸 박순도 이곳을 찾아 그의 행장에 “선조 19년(1586) 가을, 휴가를 받아 영평의 초정에 목욕하러 갔다. 이때 영평현의 백운계에 은거할 배견와, 이양정을 짓고, 백운계·청령담·토운상·창옥병·산금대·청학대·백학대 등의 명호를 제하였다”는 라는 기록을 남겼다.

▲ 화적연 전경  

화적연(禾積淵)은 한발 물러서서 연못에 몸을 담고 우뚝 솟아 있는 큰 바위를 바라보고 있으면, 과연 절경에 감탄한다. 누군가에 의하여 볏짚단을 쌓아 올린 것 같은 형상이라고 하여 화적((禾積)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서계 박세당은 화적을 보고 “암석이 극도로 기괴하여 윗부분이 마치 용머리처럼 앙연히 두 개의 뿔을 이고 있고 아랫부분은 거북 같다. 그 밑에 맑은 연못이 짙푸르게 고였다. 서쪽 벼랑은 모두 바위 봉우리인데, 삐죽삐죽 둘러선 것이 열두 봉은 됨 직하다. 박태보가 ‘이 바위 이름이 너무 속되니 귀룡연(龜龍淵)이라 불러야 합니다.’라고 한 인연이 있는 곳이다.”

화적연은 기우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어느 한 늙은 농부가 3년 가뭄에 비는 내리지 않자 하늘을 원망하면서 이 연못가에 앉아 한숨을 쉬며 “이 많은 물을 두고서 곡식을 말려 죽여야 한단 말이냐. 하늘도 무심하거니와 용도 3년을 두고 낮잠을 자는가 보다.”하고 탄식을 하고 있으려니 화적연 물이 뒤집히면서 용의 머리가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 그 후 비가 내려 풍년 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가뭄이 들면 화적연에서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생겼다 한다. 『숙종실록』에도 이곳에 신하를 보내 기우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西溪集)』에는 「화적연(禾積淵)」 칠언 절구가 전한다.

의수첨잔자동연(衣袖沾殘紫洞煙) 자동 안개에 옷소매 젖어

표표귀로입용연(飄飄歸路入龍淵) 표표히 귀로에 귀룡연에 들어섰네

경련륙륙봉여화(更憐六六峯如 ) 더욱 어여뻐라 그림 같은 열두 봉우리가

욕핍풍잠만이천(欲逼楓岑萬二千) 풍악산 일만이천 봉에 방불한 것이 

겸재는 한탄강 주변의 절경의 4점의 그림을 남겼다. 화적연과 삼부연, 정자연, 화강백전이다. 겸재는 일생 세 번을 금강산 기행을 했었다. 처음 금강산을 갔을 때는 36세 되던 해 1711년에 백석 신태동과 일행과 갔으며, 그때 <신묘년풍악도첩>으로 13점의 그림을 그렸다. 1712년 사천 이병연의 초청으로 다시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이때 30여 점의 그림을 그려 해악전신첩이라는 이름으로 사전 이병연에게 전한다. 이 그림에 삼연 김창흠과 사천 이병연의 제화시들이 달렸다. 그리고 36년 뒤 겸재는 다시 21점의 해악전신을 그렸다. 이때 나이가 72세였는데 다시 금강산을 여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1712년에는 30점의 그림이 1747년에는 21점으로 줄었지만, 이병연은 1712년에 화첩에 썼던 제화시를 다시 써넣었고, 이미 고인이 된 김창흡의 시는 홍봉조가 대필해 넣었다.

한양 흥지문을 출발하여 다락원 앞, 의정부, 축석령, 송우리, 한기영, 단청거리, 만세교 운천을 지나 갈말, 생창역, 철령을 넘었다. 가는 길에 영평팔경을 유람하며 첫 번째로 화적연을 찾아 한 폭의 그림을 남겼다. 한탄강의 노적가리 같은 바위가 강물에 자리 잡고 있다. 삼면에 모래에는 모래가 쌓이고 호수 같은 물, 큰 달팽이 같기도 하고 거북이가 고개를 들고 앞으로 가고 있는 듯한 바위가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짐이 저절로 절경임을 보여주고 있다.

굽이쳐 흐르는 강폭 넘어서는 주상절리가 깎아지른 절벽을 이루고 강가에는 현무암을 비롯하여 여러 바위와 둥글둥글 모를 잃어버린 돌들이 강변을 메우고 있다. 수심이 얕은 화적연 앞은 물살이 잔잔히 흐르지 못하고 요동을 치며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밀려 내려온다. 흐르는 물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다를 향해 요동치며 흐른다. 이를 잠재우는 것은 화적임 앞은 동그란 연(淵)이다. 이곳은 크고 작은 돌을 넘은 물살을 잠재우는 곳이다. 많은 모래가 물살을 잡고 부서졌던 물을 다시 하나로 모아 조용히 내려보낸다. 

화적은 자일리에 뿌리박고 연은 사정리 모래밭에 접해 있다. 사정리에서 화적을 보면 달팽이가 강을 따라 오르는 형상이지만, 조금 더 내려가 모래와 자갈이 어우러진 곳에서 보면 거북이가 강줄기를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보는 위치에 따라 화적의 형상이 달리 보인다. 전체적인 형상은 마치 거북이가 한 걸음씩 움직이는 모습이다. 거북이 등에는 숲이 있어 계절마다 풍기는 풍치는 무게감에서 차이가 난다. 봄이면 거북이 등은 가벼워 보이지만, 여름이 되면 무거워 보였다가 가을이 되면 풍성해 보이고, 겨울 눈 내리는 날이면  음산해 보인다.

화적 뒤쪽 연못에 담긴 물이 넘쳐흐르는 곳에는 두 마리의 달팽이 새끼 암이 있다. 옆에 있는 바위는 멀리서 보면 연못으로 들어가는 형상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얼마나 오랜 세월 물의 흐름을 볼 수 있는 바위이다. 바위에 올라서면 움푹 팬 작은 연못이 있다. 늘 물이 담겨 있지만, 맑은 날이면 물이 모두 증발하여 웅덩이로 남는다. 그 틈새로 풀이 자라서 산수화를 연상케 한다. 또한 바위의 아래에는 관통이 되어 물이 바위 가운데 아래로 흘러갈 수 있는 모양이다. 화적 뒤에는 동남 방향으로 놓인 바위가 하나 있다. 연못 방향에서 보면 달팽이 한 마리가 가던 길을 멈추고 있는 모습이다. 물이 화적연을 돌아 빠져나가는 길목에 있다. 

정선의 화적연 그림에는 이 두 바위가 없다. 그림에는 실물과는 비교되는 동적인 사선의 움직임이 많이 느낄 수 있지만, 음양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경관 상류에 높고 낮은 두 개의 산봉우리를 배치하여 화적연의 깊고 그윽한 분위기를 표현하였다. 실제 크기보다 크게 그려져 불쑥 솟아오른 바위의 형상이 음양의 조화를 담았던 그 높고 깊은 마음의 크기가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또한 바위 한쪽에는 깎아지른 주상절리를 표현하였고 반대쪽의 산은 언덕져 보이면서 굽어진 곳에 나무를 배치하여 그 깊이를 가름토록 하였다.

▲ 화적연 자갈밭  

그래서 한탄은 멀리서 풍경을 감상하면 마치 수줍어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듯한 신비롭지만, 막상 강에 들면 물살은 물보라를 일으키며 빠르게 흐른다. 높은 현무암 절벽은 주상절리로 태초의 모습을 노출한 채 보여주고 있다. 물보라의 춤사위는 강력해 보이고 이를 받치고 있는 크고 작은 바위는 숨바꼭질하듯 숨어든 물줄기가 거대한 석벽을 울타리 삼아 비밀스럽게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온 강에 힘차게 솟아오른 화적연의 양기는 계절을 바꿔가며 보는 이의 탄성을 받을 만하다.

▲ 화적연 모래밭의 달 뿌리풀 

화적연 주변에는 크고 작은 자갈과 모래가 연못을 만들고 화적을 끌어들였다. 모래와 자갈이 물살에 내려가지 못하게 달뿌리풀이 모두 잡고 있다. 갈대와 혼동하기 쉬운 식물이다. 달뿌리풀의 ‘달’은 뿌리를 달고 다니는 풀이라는 뜻이다. 기는줄기 마디가 뿌리를 달고 뻗어 나간다. 달뿌리풀은 물길의 상류에서 자라는 식물이고 이와 반대로 갈대는 물길의 하류에서 자란다. 모래밭에서 줄기를 뻗어가며 마디마다 머리카락 같은 뿌리를 내러 모래를 잡는다. 그래서 확적연의 모래는 달뿌리풀로 인해 잘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화적연 주변은 관광지로 많은 변화가 계속되지만, 원래의 모습은 강물이 만들어가기 때문에 태곳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어 영평8경의 제1경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