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한민족 최초의 국가, 고조선

한민족 DNA를 찾아서(23회)

  • 기사입력 2021.10.30 20:56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1. 고조선에 대한 우리 사서의 기록들

고조선에 대한 역사 기록, 특히 단군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별로 없다. 고려 때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서 기록한 단군 기록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전쯤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세웠다.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불렀는데, 요 임금과 같은 때이다. 그때 곰과 호랑이가 굴에 같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늘 환웅 신에게,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세

요’라고 빌었다. 환웅 신은 신령스런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낱을 주고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을 얻게 될 게야’라고 말했다. 곰과 호랑이는 받아서 그것을 먹고 21일을 꺼렸다.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제대로 꺼리지 못해 사람의 몸이 되지 못하였다. 곰 아가씨는 누구와 혼인할 상대가 없었다. 잉태하고 싶어 늘 신단수 아래에서 빌었다. 이에 환웅이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혼인하고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니, 단군이라 불렀다.

단군왕검은 요 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곧 경인년에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지금은 달達이라고도 한다.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무왕이 즉위한 기묘년(기원전 1122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보냈다. 단군은 이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겨 가고,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었는데, 1,908세를 살았다.”

고려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가 저술한 서사시 《제왕운기》의 〈전조선기前朝鮮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의 손자로, 이름은 단군일세 요임금과 같은 무진년에 나라 세워 순임금 시대 지나 하나라까지 왕위에 계셨도다. 은나라 무정 8년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서 신선이 되었으니 향국이 1천 하고 스무여덟 해인데 그 조화 상제이신 환인桓因이 전한 일 아니라.”

한편 앞서 소개한 대로 영·정종 시대의 학자 이종휘는 기전체 사서인 《동사》에서 <단군본기>를 설정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단군 시대에는 동쪽 문명국인 우리나라에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어리석은 상태였고 금수와 더불어 무리지어 살았다. 이때에 단군이 백성들에게 편발개수를 가르치니 비로소 임금과 신하, 남자와 여자의 분별과 음식과 거처에 절도가 있게 되었다. 이때는 도당시가 중국에서 나라를 세운 때인데, 비로소 단군이 개국하게 되었으니 대체로 무진년이라 한다. 9년 동안 이어지는 홍수를 당하여 팽오에게 높은 산과 큰 내를 정하게 하고 우수에 이르러 백성의 터전을 정하였다.

단군은 대체로 나이 수천 세에 죽었다. 아들 부루扶樓가 왕이 되어 갑술년에 도산에서 하우씨에게 조회하였다. 부루 이후는 세계와 연보가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어떤 기록에서는 단군이 죽지 않고 상나라 무정 을미년에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고 하였다. 또 어떤 기록에서는 주나라 때에 당장지경으로 기자를 피해갔고, 나이는 천여 세였다고 하였다. 단군은 평양에 거처하였는데, 은주의 교체기에 후세 자손이 백악산 아래로 옮겼으니 단군이 즉위한 지 1,508년이었다. 기자가 8조의 가르침으로 동쪽 문명국인 우리나라를 이어서 다스리니 우리나라의 풍속이 바르게 되었다.”

이외에 앞서 소개한 위서 논쟁이 있는 고대 사서들에는 단군조선의 역사가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세기》(《환단고기》의 일부), 《규원사화》, 《단기고사》에는 단군이 47대를 이어왔다 하며 역년과 치적을 기록하고 있는데 서로 상이한 내용들도 있다. 예를 들면, 《단군세기》, 《단기고사》에서 고조선 역년은 2096년, 규원사화에서는 1205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환단고기》는 한국상고 시대의 정치와 종교를 서술대상으로 하는데 이 책을 어떠한 관점에서 수용하는가에 따라 한국 고대사에 대한 인식은 현저한 차이가 나게 된다고 한다. 《규원사화》는 주로 전승되어온 민속자료에 의해 엮어진 것으로 상고사의 역사 자료로서 가치를 지닌다기보다는 한국 문화의 저류를 이어온 민속적 역사 인식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단기고사》는 발해본과 한문본이 전하지 않고 국한문본만 남아 사료적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으나 다른 상고 사서와 비교해 그 기본 틀이 다르지 않아 면밀한 분석과 재평가가 요망되는 사서라고 한다.

2. 한국사 교과서에 통용되어온 고조선 역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고조선이나 단군에 대한 기록이나 역사는 신화라는 관점에서 인식되어 왔다. 먼저 그동안 주류 사학계에 의해 지지되어 왔고, 우리가 국사 교과서에서 배워온 고조선의 영역과 연대에 대해 소개 한다.

가장 오래된 역사학술단체인 진단학회가 편찬한 《한국사(고대편)》에서는 고조선에 대해 ‘단군설화의 해석과 아사달사회’, ‘재래 소위 기자조선의 정체와 주위 제종족 및 연·진·한의 관계’, ‘위씨조선과 한 제국의 동방침략’의 순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는 단군의 개국 시기가 요堯시대라는 것은 민족적 자존심이나 비슷한 고대 명칭을 꼬투리로 삼은 것이라 설명하고 단군이 도읍하였다는 ‘아사달’은 지금의 평양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나라에 의해 위씨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을 세운 위치 또한 대동강 지역을 비롯한 한반도 북부라 한다.21 이것은 《삼국유사》 등이 말하는 기원전 24세기 고조선 개국설은 설화이며 고조선은 훨씬 이후에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군소세력이라는 뜻이다.

▲ 한사군 위치  

진단학회를 이끌어온 전 서울대 이병도 교수는 《한국고대사연구》에서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동방 한사군현도’를 싣고 있다. 전 서강대 이기백 교수가 《한국사신론》에서 밝히는 고조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한반도와 만주 등지의 청동기 시대는 대체로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전 4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보았다. 부여, 예맥, 임둔, 진번 등과 더불어 여러 성읍국가의 하나인 랴오허와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경에는 중국에까지 그 존재가 알려질 정도로 성장했다고 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말 연의 세력에 밀리면서 점점 쇠약해갔고 기원전 194년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축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후 기원전 108년 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그 위치는 낙랑군이 대동강 유역의 고조선 지방, 진번군이 자비령 이남 한강 이북의 옛 진번지방, 임둔군이 함남의 옛 임둔지방, 현

도군이 압록강 중류·동가강 유역의 예 지방이었다. 

▲ 위만조선 시대도  

전 서울대 한우근 교수는 《한국통사》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가 遼河 유역에서 대

동강 유역으로 번져감에 따라서 이 지역의 여러 부족 국가는 하나의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遼河 유역을 중심으로 하여 대동강 유역에까지 걸쳤던 이 부족 연맹 세력은 ‘檀君王儉’이라고 일컫는 군장을 그들의 시조로 받들게 된 곰 토템 씨족의 족장 세력이 그 맹주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古朝鮮의 부족 연맹 왕국이었다. 이 세력은 그 지역에 있어서의 지석묘 건조연대에 비추어, 늦어도 기원전 4세기 경에는 형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이때에 燕人인 衛滿은 천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왔다. 고조선의 北境을 수비하겠다는 그의 약속에 따라 고조선 왕準은 그에게 그 지방을 봉하여 주었다. 그가 

이같이 하여 북방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동안에 유이민 집단의 세력을 키워서 그것을 배경으로, 드디어 고조선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고조선 지방의 지배자가 되었다. 왕準은 남하하여 ‘辰國’으로 가서 스스로 ‘韓王’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이것은 대체로 기원전 194년에서 108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 4郡의 위치에 대해서는 고조선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우나 확실하게 단정하기가 어렵다.

어떤 학자는 樂浪郡의 治所가 된 고조선의 수도王儉域는 바로 平壤이라 하고, 따라서 한사군의 영역을 한강 이북의 지역으로 보는 데 대하여, 고조선과 한사군의 영역을 요동 지방에 비정하는 주장이 여러 학자에 의해서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조선의 연대를 기원전 4세기경으로 보고 있으며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평양 부근설과 요동 지방설을 다 소개하고 있다. 전 서울대 변태섭 교수는 《한국사통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대동강 유역에 자리 잡은 고조선이었다. 이 곳은 이미 청동기 시대에 성숙한 군장 국가를 이루고 있었으니, 그것은 檀君朝鮮의 건국 건설로부터 알 수 있다.

단군신화에 대한 기록은 고려 후기 一然이 지은 《三國遺事》가 처음이지만 그 신화는 고대로부터 古記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조선의 정치적 중심지를 대동강 유역으로 본 종래의 전통설에 대하여 근래에는 만주의 요령 지방으로 보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위씨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함락되고 漢이 설치한 樂浪郡의 郡治와 그 관하인 조선현이 대동강 유역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고조선 이동설이 제기되어 처음 요령 지방에 있었던 중심지가 뒤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 한사군 위치(BC 108)  

이것은 초기의 고조선 중심지는 요령 지방이었지만 뒤에 대동강 유역으로 옮겨왔다는 견해인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고조선이 초기 국가 형태로 발전한 것은 청동기 시대 말기인 기원전 5~4세기경으로 생각된다.” 요약하면 고조선은 기원전 24세기 국가가 아니라 기원전 5~4세기에 형성된 국가이며 고조선 후기 영역은 대동강 유역이라는 것이다. 한국교원대학교에서 지은 《아틀라스 한국사》는 고조선의 존재 시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조선은 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기원전 108년 한나라에게 멸망할 때까지 존속한 우리 민족 최초의 나라를 가리킨다”라고 한다. 또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는 “처음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 자리잡은 고조선은 점차 국가로 성장하면서 세력을 넓혀 요동 지역까지 관장하게 되었다”라고 하며 한사군에 대해서는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군’이라는 식민지, 즉 한군현을 만들었다. 군 밑에는 현을 두고 한인漢人 군 태수와 현령을 보내 식민 통치를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그동안 주류 사학계에서는 대부분 고조선이 대동강 중심의 한반도 북부 지역에 존재했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의 국가 형성 연대도 《삼국유사》 등이 밝힌 기원전 24세기를 인정하지 않고(따라서, 신화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 기원전 4~5세기경에 와서야 국가가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