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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주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시설물 홍성 홍주읍성[2]


문화재 : 홍성오관리느티나무(충남 기념물 제171호)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00-2

  • 기사입력 2021.10.21 22:43
  • 기자명 정진해 기자
  © 여하정

홍주아문을 들어서면 우측으로 밑동이 큰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나무를 ‘오관리느티나무’라 하여 보호되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고려조의 공민왕(1358년) 때에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느티나무는 고을에 액운이 낄 것 같으면 밤을 새워 울었으며 이때마다 서둘러 예방을 하였다고 한다. 역대 목민관이 홍주에 부임해 오면 가정 먼저 이 느티나무 아래 제물을 차려 놓고 군민의 무고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군청 건물 뒤쪽에는 'ㄱ'자 형태의 한옥 한 채가 있다. 이 한옥이 ‘안회당’이다. 원래 ‘근민당’이라 불렀다. 숙종 4년(1678)에 8칸으로 지었으나 한응필 목사가 고종 7년(1870)에 근민당이 비좁아 22칸으로 늘렸고 흥선대원군이 안회당으로 현판을 쓰면서 이름을 달리했다. 역대의 홍주목사와 홍주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관아건물이다. 안회당이라는 이름은 <논어>의 '노자안지(老者安之) 붕우신지(朋友信之) 소자회지(少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은 편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지금의 현판은 1991년에 새로 제작하여 걸었다.

안회당 뒤쪽에는 방형의 연못에 노거수 왕버드나무에 정자인 ‘여하정’이 자리하고 있다. 연못 가운데 자리한 여하정은 고종 33년인 1896년 당시 홍주목사인 이승우가 옛 청수정 자리에 지은 정자이다.

자연석을 다듬은 초석에 육각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두른 정자이다. 정자는 왕버드나무와 한 폭의 그림을 만들었다. 기둥에 12편의 주련은 “余方宥公事(내 목사로서 공사를 보게 되어)/作小樓二間(조그마한 누 두 칸을 지었다)/懷伊水中央(연못의 물은 중앙으로 맴돌고)/樹環焉泉縣(등나무가지는 샘가에 느렸다)/開方塘半畝(반이랑 정도 수문을 열어놓으니)/九日湖之湄(햇빛에 비친 연못의 물살에 아름답구나.)/一人斗以南(남쪽은 한 사람의 도량으로 가하건만)/捨北官何求(싫다하면 관직을 어찌 구하려하는가)/環除也皆山(환제는 모두가 다 산인데)/於北豈無?(그 북쪽에 어찌 새가 없을쏘냐?)/賓主東南美(손과 주인이 동남에서 만나 좋아하니)/ 其必宥所樂(반드시 즐거움이 있을 수밖에.)“이 걸려 있다. 

여하정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한 일이 있다. 여하정 연못 남쪽에는 200여 나이 든 소나무 한 그루가 있다. 소나무는 우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태어나 솔가지로 금줄을 만들어 외부로부터 오는 나쁜 기운을 막고,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소나무껍질이나 송홧가루로 끼니를 해결하고 솔잎으로 송편과 솔잎 술을 만들고 송진으로 불을 밝혀 독서와 바느질, 떡을 썰었다. 자랄 때는 소나무 아래서 뒹굴고 소나무로 만든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해 나르고 농사일을 했다. 죽어서는 소나무 관에 들어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간다. 태어나고 자라고 죽을 때까지 우리의 삶은 소나무와 함께하였다.

선비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시를 짓고, 화가는 소나무를 바라보며 화폭에 그림을 남겼다. 십장생 중의 하나인 소나무는 오래 산다고 하여 늘 우리 곁에 남아 있었던 소나무이다. 이곳 여하정 옆의 소나무는 고을님을 위해 이곳에 자란 것도 아니다. 정자 옆의 소나무는 풍경에서 궁합이 맞기 때문에 이곳에 그대로 두었다. 200여 년이란 세월 동안 읍성의 풍경을 그리는 데 없어서는 안될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 자리에 버티고 있다. 나무껍질이 붉은색이어서 금강송이고 적송, 육송이라 부른다. 오랫동안 여하정 옆에서 소나무로서의 그 멋을 지속하길 바란다.

▲ 홍주읍성 수문  

읍성의 서쪽으로 나 있는 길목에 월계천의 물을 끌어들여 동서로 관통하여 물을 흐르게 한 수구가 있다. 15세기 중반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문은 660cm x 440cm이다. 덮개돌은 한쪽에 11매씩 모두 22개로 덮었다. 물길의 위는 평평한 돌을 얹었고, 바닥도 편평한 돌을 깔고 틈새에 작은 돌을 끼웠다. 축조는 40cm~100cm 크기의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고, 수문의 입구에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외부와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한 수문 시설 또는 쇠창살이 설치되어 있었다.

성 밖으로 나서면 북쪽으로 성삼문과 최영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고, 남쪽에는 한용운과 김좌진 장군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최영 장군(1316~1388)은 고려 말의 명장으로 여러 차례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막고 원나라 원병과 내란 평정 등 고려를 수호한 장군이다.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 는 말을 항상 가슴에 새기며 살았으며 위화도를 회군한 이성계에 의해 처형되었다.

▲ 성상문 상  

성삼문(1418~1456)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절신으로 사육신의 중의 한 분이었다. 세종대왕을 도와 집현전에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했다.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었던 충의(忠義)의 화신이었다. 한용운(1879~1944)은 일제강점기인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중에 한 분이다. 한국 불교의 분열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며 저항적 민족시인 이며 독립투사였다. 김좌진(1889 ~ 1930) 장군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1920년 10월 청산리 계곡에서 일본군과의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쟁 영웅이었다.

수구 앞에는 손곡 이달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이달(1539~1612)은 구항면 황곡리에서 첩에서 태어났다. 당시 서자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 없기 때문에 벼슬길에 오르길 포기하였다. 서자라는 놀림에 홍주를 떠나 방랑 생활을 하다가 강원도 원주 손곡에서 일생을 보냈다. 그의 시가 이곳에 소개되었다. 이달은 당시 당나라 시풍의 시를 잘 쓰는 삼당시인(三唐詩人) 중의 한 명으로 불렸다.

대표적인 제자로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가 있다. “刈麥謠(예맥요)/田家少婦無夜食(시골집의 젊은 아낙은 저녁거리가 없어서,)/雨中刈麥林中歸(빗속에 나가 보리를 베어 숲속으로 돌아오네.)/生薪帶濕煙不起(생나무는 축축해서 불길이 일지 않는데,)/入門兒女啼牽衣(문에 들어서니 어린애들은 옷자락을 잡으며 우는구나.)”

▲ 홍주읍성 조양문 

조양문은 읍성의 성벽과 떨어진 곳이 있다. 원래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으나 지금은 성문 사이에 많은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성벽은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사통팔달의 중심에 선 조양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에 해당한다. 이 문은 고종 7년(1870)에 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세운 문루이다.  정면 3칸의 다포계 문루로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건물 창방에 걸린 조양문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1906년에는 이 성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홍주성 전투를 벌였다. 곧 1905년에 민종식(1861∼1917)·이세영(1869~1938)·채광묵(1850∼1906)·안병찬(1854~1921) 등은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고, 이듬해 5월 19일에 1,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6문의 화포로 홍주성을 공격하여 일본군을 덕산(德山)으로 쫓아냈다.

그때의 흔적이 조양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인들에 의해 북문과 서문은 파괴되어 없어지고, 조양문도 파괴하려 했으나 읍민들의 강렬한 반대 저항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문은 1975년에 완전히 해체하여 복원되었다. 1978년 10월 7일에 강도 5°의 지진으로 인해 성벽의 일부가 무너졌으나 1979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하여 1982년에 부분 보수를 완공하였다. 성문은 홍예로 짜졌으며 안가 박의 누조에는 파련화가 조각되어 있다. 성벽으로 연결되었던 부분의 안쪽으로는 협문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다. 누각의 안과 밭에는 타를 두지 않고 장여장을 둘렀다. 홍예의 천정에는 청룡 한 마리가 그려져 있다. 동쪽의 성문임을 알린다.

성문 안쪽은 '백지사지와 집단구타장면'이 새겨진 동판이 세워져 있고, 옆에는 '신앙증거 터(진영장의 동헌)'라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동헌인 경사당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다. 당시 진영을 관장하던 진영장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토포사의 직을 겸하고 있었다. 이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문초와 형벌을 받았던 장소였다. 다리가 부러지고, 살점이 형틀에 튀어나오고, 부서진 뼈는 살점을 뚫고 나올 정도의 문초와 고문을 받았다.

 "배교한다는 한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위협하였다고 한다. "죽임을 당할지언정 제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외치면서 인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존재라는 것을 증거가 되었다고 한다.

▲ 목빙고  © 김승동

목빙고 터를 향했다. 빙고는 겨울에 얼음이 얼었을 때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해 두었다가 다음 해 얼음이 얼기 전까지 사용되었던 얼음 창고이다. 서문 밖에 있는 목빙고는 나무를 이용하여 얼음 창고를 만들었다고 하여 목빙고라고 한다. 본래 이곳의 목빙고는 빙고지 또는 빙고재라고 불러왔는데, 2005년 빙고 유적 발굴에 의해 나타난 목 빙고가 우리나라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석빙고는 몇 곳이 남아 있어 그 형태를 가름할 수 있었지만, 목 빙고는 이곳에 그 터가 남아 있는 것은 처음이다.

 17세기에 만들어진 목빙고는 과거 홍주목의 관아 부속 시설로 홍주성 서문 밖 서북쪽 100m 지점에 있었다. 원래의 위치에서 현재의 위치(홍성읍 월계천길 171-18)에 옮겨와 복원해 두었는데, 입구는 높은 곳에 있고 배수구는 아래쪽에 두었다. 빙고의 양옆으로는 자연석을 쌓았고 입구의 문에는 계단을 두었고, 아래쪽의 배수구에는 안과 밖의 별도의 벽을 마련하고 얼음 녹은 물이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시설을 했다. 일정하게 모여진 얼음 녹은 물은 관을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규모는 23.86m, 너비는 5.5m, 깊이는 표고 차로 인해 가장 깊은 바닥 길이가 1.5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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