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의 범종교적 아마추어 신앙관

  • 기사입력 2021.08.31 01:43
  • 기자명 [歡喜 이석복
▲이 석 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나는 모태불교 신앙인으로 자랐고, 지금도 비교적 충실한 불교도이다. 그러나 나의 종교관은 기독교(천주교, 개신교)도 존중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교리도 불교의 교리와 별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유일신 종교인 기독교와 자기성찰의 종교인 불교의 교리가 비슷하다니 말도 안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각 종교가 탄생한 지역의 특성과 문화에 따라 종교 예식과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이 다를 뿐이고, 신앙의 본질은 ‘인류의 행복’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지난 삶을 회고해 보면 개종(改宗)의 권유도 수없이 받았지만, 나의 어머니가 “너는 부처님께 기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해주신 말씀 때문인지 불교도로서 자리를 지켜왔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도 불교에 호감을 갖고 있었고, 내가 편안하고 집안 전체가 불교문화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인격 형성기에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몇 번 절에 갔었고, 6.25 전쟁 시 아버지와 피난길에 헤어져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식사 때마다 간절하게 기원하는 천수경 몇 마디의 기도가 전부였다. 그후 중 · 고교 학창시절에는 이렇다 할 만 한 종교활동은 없었다. 오히려 친구들과 어울려 크리스마스 때 교회나 성당에 놀러 갔던 일이 생각날 정도다. 그러니 불교에 관한 지식은 거의 전무(全無)하다 할 것이다.

그러다가 1961년 육군사관학교 제21기로 입교하니, 교내에는 교회(군목사)와 성당(군신부)은 있었지만 법당(군법사제도는 1968년 도입)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히 생도1학년 때 불교신자인 훈육관(대위) 한 분이 교실을 빌려 한 달에 한 번 법회를 갖고 기초적인 불교예식을 가르쳐 주시거나, 서울 시내 조계사 또는 동국대학교를 견학을 갔었던 경험이 전부였다. 임관 후 1970년 대위 때 월남전에 참전해서 생전 처음 백마사단내 군법당을 몇 번 갔었고 그 때 법사님이 주신 기초 불교교리서와 친한 동기생이 준 성경(聖經)을 틈틈이 읽은 적이 있었다. 

불교의 교주(敎主)는 석가모니 부처님이지만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교리는 우주의 섭리와 상통하여 불교교리(佛法) 자체를 부처화 한 것이 ‘비로자나불’ 부처님이시다. 이 부처님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고 본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비로자나불’의 관계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교리해석이다. 깊은 산의 가장 큰 봉우리를 비로봉이라고 많이 불리는데 이것이 ‘비로자나불’에서 유래한다. 그만큼 우리의 문화적 일상에 종교의 영향력이 가까이 있는 것이다. 불교에 대하여 법당에 모신 부처님의 상(像)도 우상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상화 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나의 종교관이 불교교리공부나 성경지식의 전문성에서는 부족했지만 군 장교생활의 특별한 환경에서 범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전력화 차원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 

소령시절 대구에 육군방공포병교육단을 창설할 때 일이다. 창설초기 피교육생은 입교했는데 인가된 군목사가 부임 전이어서 일요일 종교시간에 학생대장이던 내가 피교육생들을 집합시켜 종교 강연을 한 적이 있었다. 준비한 강연의 주요 내용은 우리 사회에 여러 종교가 있지만 궁극적인 종교적 목표는 모두 유사하다고 설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조선시대에 도성(都城)을 들어가려면 남대문(숭례문), 동대문(홍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북대문(숙정문)의 4대문을 통과해서 결국은 모두가 광화문에서 만나게 된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각 종교의 궁극적 목표는 같다고 강조했었다. 따라서 개신교문(門), 천주교문, 불교문으로 들어가도 다 같은 곳에서 만나게 되어 있으니 어떤 종교든 자기 적성에 맞는 종교를 택하면 되고, 신앙생활을 참되게 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 좋다고 강조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괜찮은 종교강연이 아니었나 생각하며 웃어본다. 그 후 목사가 부임하고 부대규모가 적어서 군신부나 군법사가 없었기 때문에 전부대원이 모두 강당에서 군목사 지도하에 신앙활동을 통합적으로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신앙전력화’라고해서 장병들에게 신앙심은 전장에서 전투력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정신전력으로 강조되던 시기였다.

다음은 중령으로 대대장 시절 이야기이다. 최전방부대 이었기 때문에 그 당시만 해도 종교시설이 없었다. 일요일이면 가급적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들은 근처 교회와 성당에 보낼 수 있었지만 불교신자는 법당이 너무 원거리에 있어 보낼 수가 없었다. 내가 불교신자지만 대대 내 소수이었던 불교신자들에게는 사단 법당에서 경전(經典)을 얻어다 각 포대(중대)에 몇 권씩 분배해서 각자가 자발적으로 읽게 하여 불심을 배양하게 했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은 포병연대 내 지휘관 교체 시 그리고 나의 포병대대가 지원하는 보병연대의 지휘관 교체 시 환영, 환송 예배에 자주 참석해서 마치 내가 개신교 신자로 착각될 정도로 기독교 예배의식에 친숙해 있었다. 

다음은 제5사단장 시절 이야기이다. 취임해서 확인해 보니 일요일에 종교활동에 참가하는 장병은 대략 25% 미만 수준이었다. 상당수의 장병들이 평일에 부족했던 개인정비와 부대환경미화 등의 작업에 동원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에 신앙활동을 활성화하여 올바른 인격과 가치관을 확립시켜 한 차원 높게 신앙을 전력화하고 휴식을 보장해주는 계기를 만들고자 두 가지 지휘조치를 했다. ‘몸에 좋은 약은 쓰다’는 속담처럼 사단 장병들의 종교의 선택과 신앙심을 심어주고자 하는 사단장으로서의 배려와 사랑이었다. 

첫 번째는 신병교육대에 종교시설을 보완해서 무신자들에게 1, 2, 3주차 일요일에 각각 기독교, 천주교, 불교 종교행사에 순회 참석하고 4주차에는 자기 적성에 맞는 종교를 택하게 하여 신앙관을 갖도록 지도하였다. 두 번째는 월요일 사단장이 참석하는 상황실 보고에 일요일 종교행사 참석인원을 각 부대별로 보고하도록 한 것이다. 그 결과 한산하던 모든 종교시설이 만원이 되어 야외에 스피커와 의자를 준비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추가적으로 종교시설이 부족해서 최전방부대에는 종교단체의 후원을 받아 북한군이 훤하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교회, 법당 및 종각, 성모마리아상을 세워 평시 대북심리전에서도 압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군을 예편해서 우리불교의 전통인 호국불교의 정신으로 불교도들이 국가안보강화에 힘을 실어주는 활동을 하면서 불교계는 물론 개신교와 천주교 관계자들과도 많은 교류를 하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나라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평소 종교관을 강조하면서 이견을 화합과 통합으로 이끌면서 국가안보를 위해 일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다행스럽게도 내 종교가 귀하면, 남의 종교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이 일반화 되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 내에는 샤머니즘 무당부터 온갖 미신까지 수많은 종교가 산재되어 있다. 세계 4대 종교인 이슬람교까지 들어와서 포교를 할 정도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에서 종교간 전쟁이 없는 것은 우리국민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지혜롭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