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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훈련으로 맺은 전우애는 전역 후에도 빛이 난다

  • 기사입력 2021.08.02 10:46
  • 기자명 이석복
▲ 이석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직업군인이었던 나에게는 유별난 전우들이 있다. 그들과 인연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2년간 지휘했던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사단의 포병대대장 시절에서 시작되었다. 부대에는 6월 말경이면 신임장교 소위들이 10명 내외가 대거 전입하고, 그 인원만큼 기존 중위들이 전역하는 것이 연례행사로 반복된다. 그들은 바로 위관장교들의 주축을 이루는 학군장교들(ROTC : 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이다. 학군장교들은 대학시절 학군단 장교후보생으로 지원하여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하여 OBC(Officer Basic Course)교육을 받고 야전군부대로 배치가 되어 2년여간 장교로 근무하면서 국방의 의무를 마치게 된다.

통상 대대급 부대에서는 핵심간부들인 장교들이 30여명 수준인데 2년간 훈련된 중위 포병장교들이10여명이 떠나고, 신임 포병장교들을 맞이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반면 육사나 3사관학교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소수(少數)이어서 환영환송에 허리가 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수인 학군장교들의 전입전출은 외부적으로 보기에 큰 소란은 없는 것 같지만 내부적으로는 분주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마치 백조가 호숫가에서 우아하게 헤엄치는 모습이지만 수면 밑에서 발은 물살가르기에 여념이 없는 것과 같다는 비유(比喩)가 적절하다고 하겠다.

그 당시 내가 대대장 재임기간에 같이 근무한 학군장교들은 16기(78년 임관)과 17기(79년 임관) 및 18기(80년 임관)로서 학군장교 3개기와 지휘관과 부하의 인연을 맺은 것이었다. 알고보면 그들은 나와는 임관년도 기준으로 13~15년 후배들이자 막내 동생같은 연배들이었다. 학군단 제도는 1963년에 제1기가 임관하게 됨으로서 육군장교의 질이 대폭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중 일부는 직업군인으로 군대에 복무하고, 대부분은 예비역 중위로 전역해서 국가 사회에 유능한 인재(人才)로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나와 함께 근무했던 학군장교들이 전역 후 어느 정도 직장과 가정에서 안정을 찾을 때쯤 서로 찾고 모이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푸른 군복을 입고 장교의 명예를 가지고 군복무했던 학군동기전우들이 생각이 나고 그립고하여 찾았다고 했다. 내가 장군 진급했을 때는 자신들이 진급이라도 한 것처럼 축하해줬던 이 모임 초기의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이제는 내가 대대를 떠날 때 전입했던 19기와 20기까지 합류해서 ‘79평촌회’(포병대대 명칭 + 주둔지명칭)라는 모임을 결성했다. 이처럼 명칭과 회칙까지 갖추고 40년 전우들과 그 가족들까지 전우애를 꽃피우는 매우 드물고 자랑스러운 모임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모임이 모여지고 지속되는지 분석해 보면 선임기인 학군16기에 훌륭한 리더들이 있었고, 후배회원들(17기, 18기, 19기, 20기)이 군복무시 강한 훈련에 얽힌 좋은 추억과 성취감과 소속감으로 단결되었던 애대심(愛隊心)이 있었다고 본다. 전역 후 군에서 체득한 정신과 체력 그리고 리더십(leadership)으로 각자의 직장과 가정생활에서 남다른 성공을 이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대대장 시절 그들의 지휘관으로서 새로 전입이 오면 하루라도 빨리 나의 지휘방침과 부대 임무수행에 적응하고, 병사들로부터 존경받는 리더(leader)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가혹할 만치 엄격히 대하기도 했다. 

먼저 나는 대대장으로서 내 지휘 목표와 방침을 교육시켰다. 지휘목표는 “∑(시그마) 순간승리”였다. 그 의미는 전장에서 시간적으로 매순간, 공간적으로 여러 분야의 포병전투 기술이 성공적으로 통합하여 그 순간에 승리해야 전투에서 궁극적으로 승리 할 수 있다는 정신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회식할 때도 건배제의 하면서 “∑(시그마)!” 하면 모두가 잔을 들고 “순간승리!”하고 외치면서 막걸리를 마셨다. 지금도 우리 ‘79평촌회’모임에서는 어김없이 “∑(시그마)!”하면 “순간승리!”를 외친다. 이렇게 외치면서 상관과 부하가 ‘하나라는 마음’을 갖는 우리 군의 문화(文化)이기도 하다. 우리 군대의 지휘관이라면 손자병법(孫子兵法)의 모공편(謀功篇) ‘상하동욕자승(上下同欲者勝)’을 가장 이상적인 리더십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정립한 실천적 리더십 원칙을 일관성을 가지고 철저하게 교육시켰다. 나름대로 과거 소대장, 중대장을 거치면서 경험적으로 확립한 ‘실천적 리더십 18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그 실천을 강조하였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부하에게 욕이나 모욕적인 언동을 삼가고 인격을 존중해야 한다.”, “부하에게 알려주고 목적을 이해 시켜야 적극적인 참여들 유도할 수 있다.”,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본 것이 아닌 것은 보고하지 말라.”, “업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면 부하로부터 웃음거리 밖에 안된다.” 등과 같은 ‘실천적 리더십’이었다. 나의 이런 실천적 리더십 원칙들은 군복무시 물론 전역 후 사회생활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 추가적으로 학군장교들 뿐 만 아니라 모든 부하 간부들을 가혹하게 단련시킨 사례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지금같은 사회분위기에서는 상당히 어려울 것으로 생각도 된다.

첫째로 전입 시 신임장교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체험하고, 극복능력을 배양하기 위한 방편으로 3분 3회전 권투시합을 시켰다. 요령을 피우면 계속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고 시작했지만 게임이 시작되어 한 번 맞으면 바로 주먹들이 작열하기 시작해서 투지(鬪志)있게 권투경기를 했었다. 지금도 모여서 술이 몇 순배 돌면 그 시절 권투얘기가 나오곤 한다.

둘째로 당시 야전군과 사단에서 소총 야간사격술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장교들이 병사들을 지도 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시켰다. 그 지도수준을 대대장인 나에게 인정받을 때까지 일체 퇴근을 금지까지 시켰었다. 그러자 간부들이 모두 야간사격의 명사수들이 되었다. 그리고 장교 집체교육이나 부대평가에서 상위 수준을 획득하지 못한 경우 대대장 이하 전 장교가 단독군장으로 8km이상 떨어진 추진포대까지 왕복하는 16km 구보를 통하여 필승의지를 체득하게 했다. 책임은 장교가 지고, 공로는 병사들에게 돌리는 것이 나의 실천적 리더십 원칙이기도 했다.

이렇게 지휘하다보니 장교들에게 어려움이 적지 않았겠지만 전 장교들이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고, 우리 포병대대가 사단의 선봉대대(최우수부대)로 선발되는 쾌거를 이루어 모두가 큰 긍지와 보람을 느끼기도 했었다. 포병대대가 선봉대대가 된 것은 사단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 회자되기도 했다. 역시 강한 훈련을 하는 부대이어야 높은 수준의 전투력을 확보하고, 군의 생명인 사기가 높게 된다는 진리는 예나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본다. 이런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전역한 후에 직장에서도 경쟁력이 충만하고 맡은 바 업무에서 높게 평가를 받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 같다. 나는 ‘강자존(强者存)’이라는 필승정신을 부하장교들에게 실천적으로 가르쳤다고 본다.

셋째로 ‘79평촌회’ 회원들은 내가 현역일 때 우리 부대지역에서 가족들을 대동하고 1박2일 여름캠프를 한다거나, 판문점을 견학하기도 했다. 내가 전역한 후에는 옛날 군시절을 그리며 ‘79포병대대’를 찾아 후배장교들을 위문하기도 했으며, 내가 추진하는 애국시민단체 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내가 우리 육사 21기 동기회 총무를 맡고 있을 때 송년회(送年會)에서 79평촌회원(18기)이 악기연주와 송년선물까지도 준비해 주어 대대장의 위신을 세워줬고, 동기생들에게 큰 감동을 주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2010년 7월 10일에 6.25전쟁 영웅 고(故) 백선엽 장군께서 별세하셨을 때 ‘79평촌회’ 10여명의 회원들이 비를 맞으며 광화문 분향소에 참배하기도 했다. 벌써 그들도 은퇴할 나이가 넘었지만 아직도 대부분 기업과 학계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도 모임이 끝나고 헤어질 때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지 몰라도 나에게 단체로 충성을 외치면서 거수경례를 한다. 그런 순간이면 나의 마음은 그들과 함께 대대장 시절로 돌아간 듯 말로 다 할 수 없는 행복감에 느낀다. 비록 세월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지만 현역때 보다 더 정(情)이 드는 전우들이다. 이런 충성스러운 부하를 만난 나는 행복한 대대장이었다. 나는 ‘79평촌회’의 학군출신 장교부하들이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있는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더 성숙한 연륜으로 더 많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그들의 영원한 대대장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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