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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티니안섬, 한국인 후예의 존재적 의미

  • 기사입력 2021.07.20 14:00
  • 기자명 이석복

 

▲ 이석복(수필가, 차세대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  

1987년 우연히 서태평양의 작은 섬 ‘티니안(Tinian)’을 방문하고 경이로운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그리고 24년이 지난 오늘 새삼 떠오르는 추억이지만 가슴에 묻어둘 수 만 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가끔씩 우리나라와 국민들의 변함없는 무관심이 무척 아프게 다가온다.

 

당시 나는 한미연합사(CFC ROK/US)의 작전처장(준장)시절 부사령관(한국군 대장)의 수행요원으로 전시(戰時)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투입되는 미군 증원전력을 시찰하기 위해서 태평양 상의 미국 자치령인 괌(Guam)과 일본의 오키나와(Okinawa)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괌으로 갈 때 우리가 탑승한 항공기는 쾌적한 여객기가 아니라 군업무출장 목적에 걸맞게 미 공군의 KC-130 공중급유기(C-130 수송기를 개조한 형)였다. 비행도중 공중에서 전투기에 연료를 공급하는 훈련 모습을 실감나게 관찰하면서 우리 공군에도 공중급유기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났었다. (현재 우리 공군은 A330 MRTT를 2018년 이래 총4대 보유 중) 그리고 괌에서는 미공군 전력 중 세계최강의 B-52 폭격기를 실제 탑승 비행하면서 그 위력을 실감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런데 아직 미 해군전력을 보지 못했는데 일정상 주말을 맞게 되었다. 마침 괌 주재 한국 총영사가 부사령관의 지인(知人)이어서 주말에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였던 사이판(Saipan)방문을 추천하여 다녀오게 되었다. 사이판은 역시 미국의 자치령인 서태평양의 북마리아나제도(Northern Mariana Islands)의 주(主)섬으로 괌으로부터 160km 북쪽에, 부산으로부터 2400km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지금은 많은 한국인이 관광 목적으로 사이판을 찾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무역, 봉제업 등의 사업목적으로 진출한 소수의 한국 교민들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처참했던 격전지에는 전사한 일본군의 위패(位牌)들이 수도 없이 지면(地面)에 박혀있었다. 전후(前後) 유족들이 찾아와서 전사한 일본군들을 추모하고 개인적으로 위령제를 지낸 표식들이었다. 우리들이 조상을 섬기는 문화와 닮기도 했으나 다른 방식이었다. 전범국 일본의 군인들이 고향으로도 못가고 이역만리 타향에 묻혀있는 것은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 업보(業報)가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 우리와 동행한 총영사가 ‘티니안(Tinian)’이란 작은 섬이 가까이 8km남쪽에 있는데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던 폭격기들이 발진(發進)했던 섬이라며 가보자고해서 상용헬기편을 이용하여 20여분도 안되어 도착했다. 사이판과 티니안섬은 일본이 1차 대전 후 점령하고 건설했지만 1944년 7월 미군에 참패를 당하고 점령당한 곳이다.

 

헬기가 도착한 활주로에서 멀지 않은 곳에 Site #1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출력 B-52 폭격기의 무개 격납고), Site #2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출격 B-52 폭격기의 무개 격납고) 등의 표식이 있었고, 파괴된 일본의 군사시설도 여기저기 흔적이 보였다. 여기에서 출격한 비행기가 인류최초의 원폭 두 방을 일본제국에 투하하자 무조건 항복을 하였고, 무수한 희생을 초래했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꿈이 산산조각 나게 했었던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니 인간의 욕심이 허망(虛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본이 저지른 인류평화에 대한 전쟁범죄는 영원히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총영사가 다음으로 안내 한 곳은 1977년 우리나라에서 세웠다는 한국인 위령비(慰靈碑)였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 시절 세워진 것 이었다. 일본은 티니안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을 강제로 징용하여 노동에 투입했고, 많은 조선인들이 건설 중 또는 전투상황에서 희생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분들의 넋을 기리고 망국의 아픔을 되새기는 위령비라도 있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전후 생존한 징용자들이 한국으로 대부분 송환되었는데 10명은 티니안섬의 현지 차모르족 여인들과 가정을 꾸렸기 때문에 잔류를 희망해서 남겨졌다는 얘기였다. 이분들이 티니안 섬에 원주민으로 살아가는 King(김씨 후손들의 성), Shing(신씨 후손), Choi(최씨 후손), Kiosshin(강씨 후손) 등의 1세대였다고 한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2세, 3세, 4세 후손들이 전체 인구 약 3,000여명의 45%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매우 머리가 좋아서 공무원, 경찰, 선생 직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는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암튼 한국인 후손들이 섬 인구의 과반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분명히 그들은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동족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도 했다.

 

바쁜 일정가운데 찾은 티니안 섬이어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 다음 스케쥴이 충북 청주출신의 한국여성을 부인으로 맞은 북마라아나제도의 지사(Governor)와 만찬일정 때문에 한국인의 후예들도 직접 만나지 못하고 사이판으로 복귀했다.

 

그후 괌으로 복귀해서 미 해군전력 관련 시찰을 하고 오끼나와로 가서 미 해병대와 미 공군전력을 직접 경험해 보는 귀한 시간을 가졌다. 귀국 시에는 미군 장성들의 지휘기(소형 젯트여객기)를 탑승했는데 2시간 30분 만에 오산 비행장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군사업무 출장을 통해서 한미군사 동맹의 든든한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했다.

 

짧은 공무출장기간 동안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하였지만 그후로 티니안의 한국인 후예들을 위한 어떤 것도 실천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된다. 불현듯이 티니안 섬과 한국인 후예들을 생각하게 된 것도 그때의 잔상이 너무 진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티니안 섬의 한국인 후손들은 자신의 1대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한국이 세계에서 10위권의 부강한 나라라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은 그들을 기억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그 후 수많은 한국인들이 티니안 섬을 다녀갔을 터인데 별다른 소식이 없는 것을 보니 아쉽기 그지없다. 물론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 침묵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마도 여러 사람들의 뜻이 여론화 되고 적절한 동기가 부여된다면 우리 사회문화사업을 통해서 후원사업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외교적으로 미국과 잘 협조하여 한국인 후예들에 대한 지원사업을 정부차원에서 공식적으로 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도 해봤다. 한국계 후손들에게 우리말과 역사를 가르치는 세종학당을 현지에 세운다면 어떨까? 티니안 섬 정부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상호호혜적 관계를 맺어서 태평양에 있는 한국령(韓國領) 섬같이 국력진출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는 방안은 어떨까하는 꿈도 가져보았다. 그렇지만 나의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에 티니안 섬을 추가해서 우리 한국인 후예들을 위하여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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