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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꿀이죽과 한미야전사 런치타임에 관한 추억

  • 기사입력 2021.06.28 10:33
  • 기자명 장순휘
▲ 장 순 휘(수필가, 한마음문인협회 회장)     

‘꿀꿀이죽?’ 이제 과연 이 단어를 누가 기억할 것인가 의문이 들 정도의 추억이 되어간다. ‘꿀꿀이죽’은 국어사전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단어이기도 하다. 명사로서 ‘여러 가지 먹다 남은 음식의 찌꺼기를 한데 섞어 끓인 죽’으로 설명되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먹다 남은 음식의 찌꺼기’라는 것은 일단 누군가 먹었다는 것이니 사람(?)이 다시 먹기에는 상식적으로 불가한 것이 맞다. 그런데 ‘한데 섞어 끓인 죽’에서 음식의 최종적인 제품으로 재생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이라는 존재는 바로 주한미군장병들을 말하는 것이다.

‘죽(粥)’이라는 것은 음식이다. 과정은 어떠하든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죽이 된 것이다. 그런데 ‘꿀꿀이’는 국어사전적 의미가 ‘돼지’를 말한다. 그렇다면 ‘꿀꿀이죽’이라는 것은 “사람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를 한곳에 섞어서 끓여서 만든 죽으로 돼지에게 먹이려고 만든 음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꿀꿀이죽’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다. 미군들이 군대배식으로 나온 음식을 먹은 후 휘발유 드럼통에 버린 잔반(殘飯)을 한국인들이 얻어다가 다시 끓여서 죽처럼 먹었던 음식이다. 지금 삶의 수준에서는 차마 상상하기도 끔찍한 음식아닌 음식을 먹었음에 틀림없다.

그나마 이런 것도 없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지지리도 가난했던 시절이 전후에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이 주둔하던 지역은 특별한 혜택이 있었다면 바로 미군장병들이 먹다버린 음식찌꺼기라도 먹을 수 있었다는 것이니 지금의 세대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나 싶다.

이처럼 6.25전쟁 당시와 휴전후 50년대와 60년대까지 우리 국민의 상당수가 이 죽을 먹고 생존할 수 밖에 없었던 참담한 시절이 있었다. 미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주변에는 꿀꿀이죽이 저렴하게 판매되어서 전후 굶주린 배를 채워주는 시기였다. 매끼니 미군들이 식사 후에 배식기에 남은 음식찌꺼기를 통째로 담아버리는 것을 리어카로 싣고 나와서 그 안에 담배꽁초나 씹던 껌, 쵸코렛 포장지, 옥수수대, 비닐봉지, 프라스틱 수저들, 닭뼈다귀 그리고 다 뜯어먹은 갈비뼈다귀 등을 망사주걱으로 걸러낸다. 그 후에는 그대로 물을 더 붓고 펄펄 끓여서 죽탕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파는 죽은 그릇 크기에 따라 1원에서 3원, 5원짜리 곱빼기도 있었다. 퍼줄 때는 ‘복불복(福不福)’으로 큰 깡통 국자로 퍼주다보니 고기가 달린 갈비나 스테이크 조각이 담겨온다면 모처럼 최고급 고기맛을 보게되는 행운이기도 했다.

인천 창영동에는 유명한 ‘꿀꿀이 골목’이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그 골몰에는 큰 가마솥에 노리끼리한 죽이 끓고 있었다. 그 냄새는 문학적으로 도저히 표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복잡미묘한 음식냄새였다. 고기냄새가 있으면서도 빠다향기가 있었고, 햄쏘세지같은 냄새에 추가적으로 후추가루 냄새 그런데 애매한 특유의 우유냄새같기도 한 아무튼 문학적으로 표현이 안된다는 것이 차라리 맞는 것이다. 그 골목의 냄새는 가난의 냄새였거나 배고픔의 냄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서러움을 딛고 오늘날 이렇게 번영의 대한민국을 창조했다. 정말 유사이래 가장 자랑스러운 국가공동체를 건설한 부모님세대요 우리 세대라고 자부한다. 지금처럼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없이 사는 것만도 축복이다.

특별히 나는 1989년 11월 18일을 잊지못한다. 그날은 당시 의정부에 위치한 한미야전사령부(Combined Field Army ROK/US)로 첫 전입신고를 한 날이었다. 전입신고를 마치자 동료들과 식당(Mess Hall)로 갔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갔는데 코끝에 들어오는 그 냄새는 분명히 20여년 전 그것이었다. 양식이 주는 그 특유의 냄새는 대한민국의 장교로서 군복을 입고 당당히 써빙(serving)을 받고있는 나를 '백투더퓨처(Back to the future)'하는 순간이 되고 말았다. 

식탁에는 포크와 나이프, 스푼이 놓여있었다. 잠시 후 수프가 왔고, 이어서 큰 접시에 스테이크(steak)가 담겨져 왔다. 그런데 울컥 목이 메는 것은 왜였을까? 순간 뇌리에 파노라마처럼 꿀꿀이죽을 끓이고 있는 꿀꿀이 골목의 잔상(殘像)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죽 한 그릇을 먹기위해 서있었던 한 소년...20년이 지난 후 그 소년이 한미야사에서 미군장교들과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서 식사를 하려는 순간이었다. 나는 행커치프(Handkerchief)를 좌석에 걸쳐놓고 조금 빠른 걸음으로 식당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도저히 치밀어오르는 복받침에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메스홀 뒤쪽으로 가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미군들이 먹다버린 쓰레기 음식을 끓여먹던 소년이 한미연합부대의 소속원이 되어서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식사를 한다는 것은 내겐 기적이었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 묵언(黙言)의 신고를 했다. 어머님께 퇴근 후 말씀을 드리니 “장하다”고 하시며 깊은 한숨을 쉬셨는데 그 한숨에는 어머니 역시 가난했던 세월이 스치셨기 때문으로 사료(思料)된다. 아무튼 한미야사의 전입신고 후 첫 런치(lunch)는 꿀꿀이죽과 함께 이렇게 잊을 수가 없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꿀꿀이죽을 이제 다시 먹는 일이 우리 후손들에게는 있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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