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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 온 아이

  • 기사입력 2021.06.14 10:11
  • 기자명 이희영
▲ 방산 이희영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어려서 호기심이 참 많았다. 6·25전쟁이 막 끝난 후라 모든 것이 폐허가 된 상황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유일한 재미는 라디오 듣는 것이었다. 라디오에서는 늘 노래가 흘러나오고 뉴스도 나오고 드라마도 나왔다. 라디오를 들으며 나는 라디오 안에 아주 작은 사람들이 들어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느 날 나는 작심하고 라디오를 뜯어봤다. 

그 안에는 가느다란 전깃줄과 작은 유리 전구들이 많이 꽂혀있었다. ‘엥? 이게 뭐야?’ 허탈했다. 나는 어느 것에나 호기심이 많던 아이였다.

 평양에서 사범학교를 나와 선생을 하시던 아버지는 6·25전쟁이 터지기 얼마 전에 인민군에 끌려갔다. 전쟁이 일어날 거라 직감한 아버지는 인민군에 들어가면서 어머니에게 당부했다. 전쟁이 터지면 서울의 친척 집으로 내려가 있어라. 후에 인민군에서 탈출하여 그리로 갈 테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약속대로 전쟁이 터지자 혹한의 추위 속에서 나를 업고 서울로 나섰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도착하니 친척들은 모두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어머니는 할 수 없이 또 부산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흘러 흘러 도착한 곳이 부산 용두산이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오실 날만을 기다리신 것이다. 당시 친척이 이화여대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부산으로 피난 내려온 이화여대만 찾아오면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보게 된 세상은 부산 용두산 언덕배기 판잣집이었다. 전깃불도 없이 어두컴컴한 한 칸 방에 어머니가 있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어머니가 왜 천 리 길인 이곳으로 내려왔는지 그런 건 알 수도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많이 안아 주셨다. 나는 어머니의 품이 좋아 늘 안아 달라고 어리광을 부렸다. 그때마다 나는 늘 궁금한 게 한 가지 있었다. 

“엄마, 나 어디로 낳았어?” 나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이렇게 큰 나를 어떻게 낳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웃으시며 “낳긴 어디로 낳아!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내가 물어볼 때마다 어머니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하셨다. 처음엔 의아해했으나 항상 주워왔다 하니 진짜 주워왔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낳았던 주워왔던 무슨 상관이람! 어쨌든 우리 엄마인데...’ 그래도 간혹 ‘진짜 나를 주워왔나?’ 하는 생각이 들어 영도다리 밑으로 가 보았다. 서너 명의 어른들이 둘러앉아 뭔가 하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6·25전쟁 직후인지라 실제로 영도다리 밑이나 길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대개 북에서 피난 내려오면서 부모를 잃은 아이나 생활고에 시달려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이 모여든 곳이 영도다리 밑이었다. 

 어머니는 찾아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아버지를 기다리며 국제시장에서 장사하면서 살아갔다. 장사를 마치고 들어오면 나를 꼭 안아 주었다. 어느 날은 나를 품에 안고 말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더 섧게 우셨다. 오랫동안 어머니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그날 낮에 북에서 아버지와 같은 부대에 있었던 사람이라며 어머니를 찾아와서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 준 것이다. 유엔군의 폭격이 있기 전날 아버지와 같은 시간에 부대를 탈출했는데 워낙 폭격이 심해서 자기는 운 좋게 살아 나왔지만 아마도 남편은 돌아가셨을 것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내 가족의 비극이고 민족의 비극이다. 어렸지만 나는 늘 어머니가 애처롭게 보여 한 번도 어머니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기뻐하고 웃을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온 힘을 다해서 보여주려 애썼다. 당시 유명했던 코미디언 서영춘의 흉내를 내며 웃기기도 했고,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맘보춤을 추며 어머니를 웃겼었다.

 내가 결혼을 해서 딸아이를 낳았다. 어느 날 아이가 물었다. “아빠 나 어떻게 낳았어?” 순간 옛날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렇게 큰 너를 어떻게 낳아∼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지!” 딸아이가 금방 울 것 같았다. 얼른 “아니야, 엄마가 배꼽으로 낳았지∼” 그 말에 곧 딸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흘렀다. 

 딸아이가 커서 결혼을 했다. 신혼지가 부산 해운대였다. 가끔 딸아이 집에 내려갔다. 딸아이는 멋진 외제 승용차로 직접 운전하여 동백섬이며 태종대며 여러 곳을 구경 시켜 주었다. 다음 날도 또 나가자는 딸의 효심도 마다하고 나 혼자 아파트를 나섰다. 내 머릿속에는 온통 어린 시절 살았던 판잣집과 국제시장과 영도다리 밑이었다. 

 부산을 방문할 때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 영도다리이다. 지금은  깨끗하게 단장된 그곳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등에 아기를 업은 채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피난 가는 가족 동상이 있다. 영락없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참을 쳐다보다 발길을 돌린다. 나를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던 어머니가 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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