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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호통

  • 기사입력 2021.05.31 14:01
  • 기자명 이희영
▲방산 이희영, 수필가, 정보체계학 박사, 화랑대문인회 회원

어머니는 늘 말이 없고 조용하셨다. 갸름한 얼굴에 몸은 가냘프고 하늘하늘했다. 아마 요즘 태어났다면 숱한 남자들의 애간장을 꽤나 녹였을 법도 하다. 까만 치마에 하얀 저고리를 즐겨 자주 입어서인지 마치 한 마리 학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려서 나는 어머니의 그런 모습이 애처롭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초등학교 시절, 입학식이나 특별한 날에도 어머니가 나와 함께 학교에 가려 나서면 나는 한사코 혼자 가겠다면서 내달렸다. 선생님을 만나고 친구들이 볼 어머니의 모습이 창피했었다. 

 어머니의 내성적인 성격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어머니는 학교에 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때도 치맛바람은 있었다. 돈 있고 잘 사는 우리 반 어머니들이 학교에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는 장면을 여러 번 봤었다. 어렸지만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는 어려서 얼굴이 예쁘장하게 생겨 여자애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름까지 여자 이름이라 놀림도 많이 받았다. 그런 내가 놀기를 좋아하고 장난이 심한 데다 싸움질을 많이 해서 얼굴에는 손톱자국이 마를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북에서 피난 내려와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생계를 꾸려가야만 하는 처지였으니 나에게 신경을 쓰기가 어려웠을 것이란 생각도 들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아버지도 없이 자라는 하나 밖에 없는 외아들에게 어찌 그리 무심했단 말인가. 개골창에 빠지고 머리가 깨져 들어와도 “에구, 이 장난꾸러기야!” 하시며 씻기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그때는 한 반의 학생수가 80∼90명 정도였다. 12시가 되면 각자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고 1시까지 쉬는 시간이다. 우리에겐 이때가 최고의 노는 시간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반 친구들은  화장실도 가고 우르르 운동장으로 몰려 나간다. 교실에는 앞뒤로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때는 이때다! 하고 나는 몇 명과 의기투합해서 뒷문에 나무 의자들을 쌓아 올렸다. 누군가 문을 열기만 하면 쌓아놓은 의자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나는 교실로 들어오던 친구들이 갑자기 무너져내리는 의자에 놀라는 광경이 너무 재미있어 가끔 이런 장난을 했었다. 그날도 밖에 나갔던 친구들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문이 열렸다. ‘아차!’ 담임선생님이 들어온 것이다. 선생님은 늘 앞문으로 들어오셨는데 하필 이날은 뒷문으로 들어오신 담! 친구들을 골려주고 한바탕 웃으려 했는데 순식간에 초상집이 되어 버렸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선생님은 어느 놈이 이런 짓을 했냐고 큰 소리로 다그쳤다. 내가 주모자가 되어 선생님 앞에 불려 나갔다. ‘오늘 되게 얻어 맞겠구나!’ 각오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때리지는 않고 “너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어머니 모시고 와!”.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을 그렇게 싫어하는 나인데,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내디디며 집으로 향했다. 아무리 낙천적인  성격이래도 이때만큼은 ‘어떻게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하나? 어머니가 뭐라 하실까?...’. 생전 처음 걱정이 태산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어머니가 의아해서 물었다. “너 왜 벌써 왔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이 엄마 데리고 오래” 더 섧게 눈물이 났다. “왜?” “내가 장난을 심하게 했다구~” 어머니는 바로 “그래 알았다. 같이 가자” 그러고는 옷을 챙겨 입으셨다. 

 나를 데리고 선생님을 찾은 어머니에게 선생님은 “다름이 아니고 희영이가 장난을 좀 심하게 해서요...” 말이 끝나자마자 어머니는 “아니, 아이가 학교에서 장난을 쳤으면 학교에서 때리던지 벌을 주든지 할 일이지, 왜 엄마를 오라 마라 하는 거예요!” 옆에 있던 나는 ‘내 어머니가 맞나?’ 싶었다. 처음 듣는 어머니의 호통이었다. 어머니의 한 마디에 쩔쩔매는 선생님을 보니 하늘 같았던 선생님이 초라해 보이며 야릇한 통쾌함도 느껴졌다. 

 그 일 이후로 나는 담임선생님과 한 번도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한 번쯤은 받았을 개근상을 포함한 상이라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 선생님은 4학년부터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줄곧 담임을 맡았다. 3년 동안 나는 담임으로부터 버려진 아이일 뿐이었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나 혼자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며 올곧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것은 그 어린 시절 모든 일을 내 스스로 살아가라는 ‘어머니의 호통’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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