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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목소리

  • 기사입력 2021.05.10 09:36
  • 기자명 方山 이희영
  수필가.정보체계학 박사.화랑대 문인회 회원 이희영

 요즘 나는 노래를 부른다. 작년 3월부터 부르기 시작해서 지금껏 300여 곡을 불렀다. 직접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려왔다. 노래를 부르고 그에 맞는 사진과 영상들을 직접 찍거나 인터넷에서 찾아 동영상으로 편집하여 유튜브에 올린다. 하나부터 열까지 ‘나’ 홀로 작업이다. 시간도 걸리고 어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완성하고 나면 마치 영화감독이 한 작품을 완성한 것처럼 황홀감에 도취하곤 한다. 

 노래를 아무리 열심히 불러도 동영상을 만들지 못하고 남기지 못한다면 내가 노래를 부르는지 누가 알기나 하랴? 작고한 코미디언 서영춘이 한 말이 생각난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떳어도 고뿌(cup) 고뿌(일본어/koppu) → 컵의 일본식 발음

가 없으면 못 먹습니다! 깔깔깔~”

 나는 아버지없이 자랐다. 아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사진 한 장도 없다. 나는 평양 성내에서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인민군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이듬해 6.25가 터지자 소속된 부대가 궤멸되면서 이름 모를 산속에서 돌아가셨다. 김일성은 우리 집을 다 부수고 그 자리에다 김일성 광장을 만들고 무슨 궁전이라는 이름의 건물을 지어 놓았다. 가끔 평양에서 인민군 열병식 하는 장면이 나오는 그 자리가 내가 태어난 곳이다.  

 어머니는 나를 들쳐업고 남으로 내려왔다. 피난민 대열에 묻혀 부산 용두산까지 내려와 꽈리 틀어 산 곳이 산자락의 판잣집이었다. 몇 년을 살다가 영도의 청학동으로 이사를 했다. 남쪽 창문으로는 드넓은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뒤쪽으로는 산이었다. 그 산을 넘으면 부산의 명소 태종대가 있다.

 몸매가 가냘프고 하늘하늘한 어머니는 학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침이면 신작로 길을 내려가 버스를 타고 부산 국제시장에 장사하러 가셨다가 어둑어둑 해 질 무렵이면 신작로를 따라 걸어 올라오셨다. 나는 매일매일 창문으로 어머니가 돌아오는 신작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저만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달음질하여 어머니에게로 달려 내려갔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깡충깡충 뛰며 마냥 좋아했었다. 

 어머니는 남쪽 창문을 내려다보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내 고향 남쪽 바다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오...’ 어렸지만 듣기 좋았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봉선화 노래다.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봄처녀 노래다. 어려서 들었던 어머니가 부르시던 노래다. 어머니의 노래는 언제나 슬프고 애처롭게 들렸다. 

  어머니가 그 노래들을 왜 그리 부르셨는지는 다 클 때까지 몰랐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평양 사범학교를 나와서 학교 선생을 했고 노래를 아주 잘 부르셨다고 했다. 가고파, 봉선화, 봄처녀는 평소 아버지가 즐겨 부르던 노래였다. 노래를 너무 잘 불러서 평양 방송에도 여러 번 나갔다고 들었다. 어머니의 그 노래들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래와는 전혀 길이 다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내가 노래를 부를 일이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노래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국방부에서 근무할 당시 군인교회 성가대 덕분이었다.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언제나 행복했고 남모를 황홀감에 마음의 감동을 느꼈다. 

 단독주택인 2층 방을 노래 부르는 공간으로 꾸며 혼자 노래를 불렀다. 봐주고 들어주는 사람 없지만 단 한 사람만이 들어주었다. 아버지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부르는 노래 속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함께하고 있다. ‘가고파’, ‘봉선화’, ‘봄처녀’를 들으시고 아버지는 귓속말로 이렇게 속삭여주었다. ‘가고파’는 영도의 청학동 남쪽 바다이고, ‘봄처녀’는 사랑하는 아내였고, ‘봉선화’는 내가 태어난 집 뜨락에 핀 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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