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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주의의 파수꾼으로 걸어온 길

  • 기사입력 2021.04.14 21:45
  • 기자명 수필가 이석복
▲차세대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전 육군 제5사단장

 일생을 나라 지키는 일을 하면서 앞만 보고 달려오다가 전역의 때가 된 어느 날 선배들이 그랬듯이 나도 민간인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전까지 근무하고 오후에 한미연합사에서 한미 장병들의 축하 속에 전역식을 성대하게 가졌지만 전역 후를 생각하거나 준비 할 틈도 없었다. 전역식까지는 당당했지만 막상 준비없이 민간인이 되니 솔직히 가슴이 미어지는 듯이 아프고 답답하고 망막했다. 아마도 이것은 슬픔이 아니라 군에 대한 애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행히 지인의 안내로 전역 다음날 합천 해인사의 말사(末寺)인 희랑대란 암자에서 일주일간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주지스님은 첫 인사 때 “넘어진 김에 편히 쉬다 가시라”는 덕담 겸 화두를 던져 주었다. 스님과 하루 세차례 새벽, 사시(11시경), 저녁 예불을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산사 근처를 산책하면서 또는 차분히 앉아서 참선을 하며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는 시간으로 보냈다. “나는 잘 살아왔는가? 열심히 살았지만 잘 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앞으로라도 잘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무엇이 성공하는 삶인가?”라는 자문 속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번뇌하는 귀한 시간이었다.

  애초에 돈을 많이 버는 것은 내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것은 아니고, 정치도 아내가 극구 말리니 내 길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봐도 답이 맴돌 뿐인데 벌써 내일이면 떠날 날이라 내심 다급해졌었다.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일간 생각 한 것을 정리해 보았다. 지금까지는 군에서 능력에 벅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고, 가정도 나를 제일로 알아주는 아내와 바르게 살아가는 두 아들이 있으며 나도 건강하게 살아 온 것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나이가 쉰넷 밖에 안되었으니 앞으로도 어떤 기회가 올지 모르지만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백의종군해서라도 국가와 사회발전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제2의 인생을 찾기로 했다. 그렇게 전역 후 인생진로를 결정하니 그런대로 마음이 가벼워지고 생기가 나는 것 같았다. 산사의 그 일주일은 정말 인생의 귀하디 귀한 시간이었다.

  사실은 일생을 통해서 ‘군인의 길’ 이외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배우지도 크게 고민하지도 못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하여 잘못 알거나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속세로 돌아와서 10여년은 비핵지대 관련 국제회의 한국대표단, 정부투자기관의 임원, 대학원의 안보과정 겸임교수, 한미우호 관계 활동을 하면서 바쁘게 봉사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러다가 깨달은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의 국민계몽운동’이 너무도 절실한 시대적 소명을 느꼈다. 제2의 군인의 길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한국문화안보연구원이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해 문화안보활동을 통하여 국민들이 자연스럽게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신념화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불교도로서도 “나라가 있어야 종교도 있다”는 신념으로 불자들의 애국활동에 솔선참여하고 있다.

   그러던 중 얼마 전 육사 동기생이 우리가 잘 몰랐던 미국이야기라면서 『네오 로마제국』이란 표제를 붙인 원고를 내밀었다. 읽다보니 너무 재미있고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미국의 정신이 상세히 연구되어 있었다. 원고를 놓을 수가 없어 밤을 꼬박 새워 다 읽었다.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키워드(key words)는 ‘공화주의’였다. 개인의 생명, 자유와 평등 그리고 행복 추구권 등을 중시하면서 공공선이라는 가치에 역점을 둔 ‘공화주의’가 미국의 건국사상이고, 이 사상의 뿌리는 고대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래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예로 노예제도를 없애기 위해 즉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다수결이 아니라 그 많은 희생까지 무릅쓰고 남북전쟁을 치른 것이다. 미국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의 교훈이 ‘의무(Duty), 명예(Honor), 조국(Country)’인데 이것도 ‘공화주의’의 정신에 근거한다. 미국 공화주의의 전당인 의회 건물에 로마 건축양식인 판테온의 기둥이 왜 세워져 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원고는 정말 많은 국민들에게 읽혀야 된다고 결심을 하고 바로 책출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보니 나 자신도 ‘공화주의’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문득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떠올랐다. 문무를 겸비하고자 주경야독하던 그 시절에 임관하기 전 읽으면 민주공화국이라는 대한민국의 헌법적 정체성을 잘 이해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노선배로서 육사교장에게 전화로 도서기증 의사를 전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 육사 4학년 생도들에게 이 책을 기증했다. 현재 사관학교 생도대 각 중대별 도서장에 비치되었다고 들었다. 알고보면 우리 국군은 6.25 전쟁을 통해 무너질 뻔 했던 대한민국의 정체(政體)인 ‘공화주의’를 지킨 파수꾼이 아니었던가? 우리나라의 기업은 일류가 되었지만 정치는 3류라는 부끄러운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의 낙후된 정치문화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할 많은 가치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공화주의는 반드시 지켜지고 대대로 계승발전하여야 한다. 비록 팔순 고개를 바라보면서 나머지 인생은 ‘공화주의’의 파수꾼으로 걸어온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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