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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DNA를 찾아서(12회) 몽골군의 한반도 침공과 고려의 항쟁

  • 기사입력 2020.12.17 08:11
  • 기자명 김석동
▲ 필자 김석동     

몽골군의 한반도 침공과 고려의 항쟁

1231년 칭기즈칸을 이은 우구데이칸 때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다. 칭기즈칸은 한때 맏아들 ‘주치(후엘룬이 메르키트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와 낳은 아들)’를 후계자로 삼고자 했으나, 차남인 ‘차가타이’는 주치를 ‘메르키드의 잡놈’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차가타이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샀고, 타협책으로 삼남 우구데이가 대권을 이어받았다. 당시 고려는 무신정권으로, 최우가 집권하고 있었다.

고려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해 끈질기게 항전했다. 몽골 기병은 전쟁이 없을 때는 하루 200km, 전쟁이 있을 때에도 40km 이상 진군할 정도로 놀라운 기동력을 발휘해서 전광석화처럼 전쟁과 전투를 끝냈다. 그러나 고려와는 화의를 맺는 1259년까지만 해도 28년, 개경에 환도한 1270년까지 계산하면 39년이라는 긴 기간이 필요했다. 1273년까지 이어진 삼별초 항쟁을 더하면 무려 42년에 이른다. 이는 몽골이 가장 어렵게 치른 전쟁이었다. 다른 나라와 달리 고려가 오랜 기간 항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고려는 전통적으로 해상강국이었다. 고려 해군은 우수한 전함 건조 기술과 해전 능력을 보유했다. 고려 후기 최무선 장군(1325~1395년)은 화약과 화기를 개발하고 화포를 전함에 장착하여 왜구를 격퇴했다. 약 200년 후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화포를 앞세워 왜군을 섬멸한 바 있다. 고려 조정은 몽골군이 침공하자 강화도로 천도하고 산성을 쌓았다. 몽골군이 해전에 약하기 때문이었다. 몽골군이 강화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고려 해군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빠른 물살의 강화 해협과 넓은 갯벌 등 자연의 강력한 방어진지를 통과한 후, 강화도 산악 지형에 삼중으로 쌓은 성을 넘어야만 했다. 백성들의 대몽 항쟁은 계속되었고, 정부도 육지 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어느 정도 확보해 항전을 독려할 수 있었다. 게다가 몽골은 

금, 송과 큰 전쟁을 하고 있어 고려 침공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과연 몽골이 다른 나라와 벌인 전쟁과 비교해볼 때 전력을 다해 싸웠을까? 몽골은 고려를 정벌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었을까? 해전(海戰)에 약하다는 점도 몽골과 같은 유목민(여진)이 세운 청나라가 병자호란(1636~1637년)때 강화도를 함락한 점을 감안하면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몽골은 다른 점령국은 초토화하거나 나라를 아예 없애버리고 직할령으로 했으나, 고려에 대해서는 유례없이 국체를 유지하는 부마국으로 삼았다. 고려는 1259년 강화 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130년 이상 존속했다. 

이와 관련해, 원나라 역사元史 등에는 몽골의 고려에 대한 특별한 정서를 읽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몽골과 한민족의 연결고리 몽골과 한민족은 어떤 관계였을까? 다음의 단서를 통해 추정해볼 수 있다.

① 몽골 등 북방민족들의 친연성에 대한 상호인식

북방 기마민족인 선비(북위·연), 거란(요), 여진(금, 청)은 만주에서, 몽골(원)은 몽골 고원에서 각각 발흥하여 당나라 이후 천여 년 동안 중국의 전부 또는 상당 부분을 지배했다. 이들 북방민족 간에는 혈통에 기인한 문화·관습 그리고 정서적 유대가 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만주 그 땅, 사람 그리고 역사》는 “초원의 유목민족과 만주의 소위 반유목민족은 문화의 차이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국가 형성 과정, 제국적 이데올로기, 국가 의례, 그리고 한족을 통치하는 구조와 패턴에서 많은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 몽골 헨티에서 만난 브리야트인바이칼 호수 인근의 브리야트족 마을 

몽골인의 선조로 알려진 실위(室韋)는 6세기경 중국 사료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부터 대싱안링 산맥에서 활동해온 민족으로 선비계에 속한다. 이들 가운데 몽올실위가 10세기 이후 몽골 고원 오논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원형을 이루었다는 분석이 있다.

북방민족사에 대한 여러 저서를 쓴 중국의 주학연 박사는 ‘몽골은 동호계 선비족의 후예’라고 한다. 몽골의 원나라는 통치하는 주민을 1)지배민족인 ‘몽골인’, 2)위구르 등 준몽골인인 ‘색목인’, 3)금나라 치하의 거란·여진·중국인 등 ‘한인’, 4)남송의 유민인 ‘남인’ 등으로 나누면서 유목민족을 우대했다. 반면 한족 왕조인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을 분리하여 격리함으로써 세력화를 막는 방어 전략을 썼다. 다음에 등장한 북방민족의 국가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의 통혼을 금지시켰을 뿐 아니라, 심지어 만주 일대에 봉금 지역

을 설치하여 한족의 이주를 막는 등 만주족의 발상지를 성지화했다.

이외에도 북방민족들 간에는 공유하나 한족과는 분명히 다른 정서적 관계를 보여주는 수많은 기록과 흔적이 있다.

▲ 바이칼 호수 인근의 브리야트족 마을  

② 단재 신채호가 본 고대 북방민족과 한민족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골·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언어와 풍속을 연구한 결과, 조선·만주·몽골·터키 등 네 언어는 동어계이며, 같은 혈족이라고 결론내렸다. 

조선·만주·몽골·터키·헝가리·핀란드가 3천 년 전에는 하나의 혈족이었으나, 환경과 시대에 따라서 각자의 자성(自性)을 가지게 된 것이라 했다.《조선상고문화사》에서는 흉노를 옛 몽골 땅에서 목축을 하던 일종으로서, 진한(고조선)의 속국이 되었다가 진한이 쇠하자 자립하여 중국 전국 시대 말에 강성해져 자주 중국을 쳤다고 했다.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는 동국東國민족을 대략 선비족·부여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의 여섯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부여족이 단군의 자손들로 다른 종족을 흡수하여 동국 역사의 주류가 된 것이라고 썼다. 이러한 역사적 고찰은 몽골을 비롯한 북방민족과 한민족의 관계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③ 한민족과 몽골족에 대한 여러 기록과 견해

몽골-만주-한반도-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유전학적으로 가까운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과 관련, 한국인의 70~80%는 북방계이고 나머지 20~30%는 남방계이며 기타 유럽인 등이 섞여 있다는 연구가 있으며(10),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 한국인의 주류는 바이칼 호수에서 온 북방계 아시아인이라는 연구도 있다.(11)

김운회 교수(동양대)는 초기 한반도 정착인들은 소수의 남방계로서 주로 해안을 따라 이동했으며, 한반도에 이주한 북방계는 주로 동몽골·만주에서 넘어와 소수의 남방계를 압도하고 한반도의 주류 민족으로 성장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는 또 선비족을 일컫는 ‘동호’는 예맥, 숙신과 넓게는 같은 개념이라 한다.

조선 시대 청나라 사절단 일원인 최덕중은 《연행록》에서 조선이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몽골과 군사연합을 맺어야 한다는 조·몽 연합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몽골 브리야트족은 자신들과 뿌리를 같이하며 바이칼에서 발원한 '코리족의 일파'가 동쪽으로 가서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믿는다. 바이칼의 브리야트족 마을에서 한국인과 가장 닮은 외국인을 볼 수 있다. 그들은 한국인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필자가 수년 전 바이칼을 방문했을 당시 이르쿠츠크 공항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반가워 인사를 건넸더니, 자기는 브리야트인으로 이르쿠츠크 시의 문화국장으로 일하고 있는 공직자라고 하면서 몹시 반가워했던 기억이 난다.

브리야트족은 바이칼의 브리야트 공화국을 비롯한 러시아에 약 45만 명, 몽골 헨티주·내몽골 등에 5만명이 살고 있다.

▲ 몽골 제국 영토에 후손들이 세운 국가  

박원길 교수(칭기즈칸 연구센터)는 고구려는 코리족이 남하해 만든 국가로, 몽골과 친연성을 가진 민족이라고 한다. 또 고대에는 우리 민족이 동몽골에서 몽골족과 어울려 살았는데,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살면서 먼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몽골과 우리가 오래전부터 공유해온 친연성은 문화·관습·정서 등 많은 분야에서 엿볼 수 있다.(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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