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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전태일 50주기, 노동존중 사회 아직 갈길이 멀다

  • 기사입력 2020.11.14 08:18
  • 기자명 편집자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이어지던 1960∼70년대 청계천 평화시장에는 봉제공장이 즐비했다. 볕도 들지 않는 사업장에는 풀풀 날리는 먼지 속에 하루 15시간 안팎의 노동에 시달리는 10대 노동자들이 넘쳤다.

서울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평균 13세의 이들 어린 여공은 장시간 노동을 감수하고도 당시 커피 한 잔 값에 해당하는 일당 50원을 받았을 뿐이다. 개발 도상의 경공업 중심 수출경제를 떠받친 산업일꾼들의 노동 대가는 그리 고약했다. 노동자들은 늘 배가 고팠고 잠이 모자랐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 통치 세력과 냉혈 자본의 성장 일변도 발전주의 논리 앞에 고꾸라진 당대의 참혹한 노동 현실은 한 평범한 청년 노동자를 노동운동의 길로 인도했다. 평화시장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연민과 연대에서 나아가 한국 노동 현실의 개선을 정부에 청원하던 청년은 끝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정글 자본주의의 어두운 노동 실태를 온몸으로 세상에 일깨우기에 이른다.

1970년 11월 13일 청년 전태일이 만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산화한 지 내일로 50년을 맞는다. 근로기준법을 지키라고,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고, 자기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하며 그가 떠난 지 어느덧 반세기가 흘러 버렸다. 전태일의 분신 이후 수많은 전태일의 후예들은 노동 운동의 역사를 새로 썼고, 그에 힘입어 노동권은 진화했다.

50주기를 하루 앞둔 12일 뒤늦게나마 전태일 열사에게 국민훈장 중 첫 번째 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된 것은 의미 깊다.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과 노동자 권익 보호, 산업 민주화 등 한국 노동운동 발전에 기여한 열사의 공이 공인되는 역사적 순간이다. 노동계 인사에게 무궁화장이 주어진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전태일 훈장 추서에 부쳐 전태일재단은 "전태일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역사와 사회에 분명하게 아로새긴다는 점에서 뜻깊은 일"이라고 평가하면서 '전태일 3법'(근로기준법 11조 개정·노동조합법 2조 개정·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의 조속한 입법을 촉구했다.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일조차 빨갱이 짓으로 취급하던 야만의 시절은 갔어도, 또한 법정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의 문화가 운위되는 문명의 시대는 진작 왔어도 아직 노동의 갈 길은 멀다. 여전히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이며 노조 조직률은 11.8%로 밑바닥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약 750만 명으로 전체 노동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6%나 되며 그들의 평균 임금은 정규직의 55%에 그친다.

그런데도 대기업 정규직 중심 노동계의 비정규직 이해 대변은 한계가 뚜렷하고 산업별 노조 재편과 노-노 갈등 구조의 혁파는 해묵은 숙제로 그대로 남아 있다. 노동계의 사회적 대화 참여 부진은 성장한 노동 역량에 걸맞은 사회적 책무 불이행이라는 지탄을 받기 일쑤다.

전태일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준수하라고 외친 근로기준법조차도 오늘날까지 모든 노동자의 성전은 아니다. 적용 범위를 정한 제11조가 5인 미만 사업장을 예외로 뒀기 때문이다. 전체 사업장 중 60%인 이들 사업장의 노동인구는 350만 명을 헤아린다.고스란히 노동권의 사각지대다. 택배기사, 대리운전 기사, 학습지 교사 등 특수고용노동자 221만 명도 사실상 노조를 가동할 권리가 없다. 원청업체의 계약해지 우려 등으로 파견, 용역 등 형태의 간접고용노동자 346만 명은 원천적으로 단체행동권을 제약받는 게 현실이다.

그래도 노동의 진보는 더디지만 계속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아 비대면 일상이 심화하고 택배가 급증하는 상황에 닥쳐 택배노동자 과로사 방지, 필수노동자 보호 강화, 전국민 고용보험 구축 노력이 검토되고 있다. 다음달 중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가 내놓겠다는 종합대책이 취약 노동계층의 믿음직한 사회안전망이 되길 바란다. 택배기사에 대해선 하루 작업시간 한도를 정하고 주5일제를 유도한다는 내용이다. 인명 사고가 난 기업과 사업주에 형사 책임과 징벌적 손해배상 책임을 지우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안은 야당 중심으로 별도 제정이 추진되고 있고, 동시에 과잉 입법이라는 지적을 고려하여 입법 취지를 살리는 방향으로 산업안전보건법 등 기존 법을 보완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청와대는 전태일 열사에 대해 훈장을 추서하며 "정부의 노동 존중 사회 실현 의지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의미를 보탰다. 노동 존중 사회는 성취하기 힘든 저 높은 지향이지만 끊임없이 추구돼야 할 고귀한 이상인 것도 분명하다. 소득 격차와 부동산 불로소득 등에 따른 자산 양극화에 부의 대물림까지 심화하는 사회에서 노동이 존중받기를 기대하는 건 망상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으려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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