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천공덕(越川功德)의 상징 ‘보성 벌교 홍교’

문화재 : 보성 벌교 홍교 (보물 제304호) 소재지 :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154-1번지

  • 기사입력 2020.08.31 20:41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 전문가

사람은 가만히 정체하여 살 수 없다. 필요 때문에 어딘가 걸어서 다녀야 했다. 늘 평탄한 길과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위험한 곳도 있었다. 목표지점을 가기 위해 냇가에는 돌을 놓았고 계곡에는 큰 나무를 쓰러뜨려 걸쳐놓고 건너다녔다. 인류 이전에 원숭이는 자기가 걸어가는 길에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계곡에 넘어진 나무와 나무를 연결하고 있는 덩굴 식물을 이용하여 건넜을 것이다. 사람은 계곡이나 작은 하천에 흩어져 있는 징검돌을 보폭만큼 놓아 건너간 데서 다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징검다리는 오늘날 교각이 있고 청판석이 있는 석교가 만들어지고, 넘어진 나무는 구형(構桁)이 되고, 덩굴은 케이블이 되어 현수교가 되지 않았나 한다.

 

세계 최초의 아치석교 원리는 에트러스키인이 이용하였고, 로마 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페르시아인에게 전해졌다고 한다. 이것이 중국에 전해졌고 다시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지금은 목교는 남아 있지 않고 석교만 남아 있다.

삼국시대의 다리는 마을 자체에서 필요 때문에 가설한 다리도 있었지만, 대부분 국가 정책으로 축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다리는 413년에 축조된 평양주대교이다. 또한 구전으로 전해오는 경주 서천교 주변의 금교 또는 송교와 춘양교와 월정교가 있는데, 월정교는 2018년 9월에 복원되었다. 이 외에도 궁남루교, 효불효교, 굴연천교, 신원교, 남정교 등이 삼국시대의 대표적인 다리로 들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무지개다리는 불국사를 중창할 때 만들었던 청운교와 백운교와 연화교와 칠보교로 완전하게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이후 고려 시대로 넘어오면서 개성의 선죽교가 남아 있다. 아쉽게도 가 볼 수 없지만, 늘 조선의 이성계와 정몽주에 대한 일화가 전해지면 떠오르는 다리이다. 이 다리는 석재로 꾸며진 단순교로서는 세계 최초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다. 나복교라 불리는 이 다리는 통일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러 왔을 때 그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그를 맞아 항복을 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전남 함평의 고막천 석교는 유일하게 고려 시대(충렬왕)에 만들어진 다리로 지금도 남아 있다. 투박해 보이면서 간결하고 다듬지 않은 석주를 세워 그 위에 노면을 짜 올 린 평교 형식의 석교이다.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곳곳에 많은 석교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청계천과 중랑천 물이 만나 한강으로 유입되는 곳에 놓인 살곶이다리, 즉 진곶교(사적 제160호)이다. 서거정이 이 다리 너머에서 들판의 풍경을 보며 한마디 하였다. "손바닥처럼 판판한 들에 풀은 돗자리 같은데 맑게 갠 날 따뜻한 바람이 사람을 훈훈케 하네. 아침에 푸른 적삼 잡히어 술을 사 가지고 삼삼오오 벗을 지어 봄놀이를 나서는 곡수유상(曲水流觴)의 술잔을 속속 돌리다 보니, 고래처럼 마셔대다가 술병은 쉬 말라버렸네. 밝은 달밤에 준마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옥피리 소리 잦아들 제 살구꽃은 떨어지네."라고 하였다. 그들이 실컷 마신 곳이 살곶이벌(뚝섬)이다. 살곶이벌은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다 살곶이벌로 나중을 나온 아들 태종 이방원을 발견하고 화가 치밀에 화살을 날렸다. 날아오는 화살을 본 이방원이 차일 기둥 뒤로 피하자 화살은 차일 기둥에 꽂혔다. 그래서 '화살이 꽂힌 곳'이란 뜻에서 '살곶이벌'로 부르게 되었다고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1420년(세종 2) 상왕 태종을 위하여 세종이 이곳에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여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유속이 빠르고 홍수로 인해 공사는 중지되어 있다가 73년이 지난 1493년(성종 24)에서야 완성되었다. 다리의 위아래를 보면 거대한 돌기둥을 강에 세우고 그 위에 받침돌을 올린 다음, 대청마루를 깔듯 긴 시렁돌을 깔아 통로를 만든 이른바 형교이다.

장충단 공원 어귀에 자리 잡고 있는 수표교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다리이다. 청계천 2가에 있던 수표교는 1959년 청계천 복개 공사로 부득이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청계천의 복원 공사로 원래의 위치로 갔으나 했으나 강폭의 문제로 이 자리에 눌러 앉게 되었다. 수표교는 청계천의 7개 다리 중에 가장 완성도가 뛰어난 다리로 알려져 있다. 1760년(영조 36) 기술자 20인을 동원하여 대규모로 청계천 준설 작업을 벌였는데, 이때 수표교 앞 개천 복판에 돌기둥을 세워 10척까지 눈금을 긋고 물이 불어나는 상황을 수시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또, 개천 바닥을 수표교의 교각에 표시하여 수심의 기준으로 삼았는데, 이를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고 하여 지금도 이 네 글자를 찾아볼 수 있다. 수표교는 교량의 기능뿐만 아니라 수위를 재는 과학적인 기능도 지녀 매우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 외에도 창경궁의 옥천교, 곡성의 능파각목교, 수원 화홍교, 벌교 홍교 등이 조선의 대표 다리로 지금껏 남아 있다.

  © 벌교 홍교

특히 지방에 남아 있는 몇몇 홍교 중에 벌교 홍교가 있다. 이 홍교는 보성읍에서 국도 2호선을 따라 순천 방향으로 가다보면 벌교읍에 도착한다. 여기에 소설 ‘태백산맥(조정래 작)의 주 무대로 1948년 여순사건에서 6.25에 이르기까지 민족의 지나친 속박의 현장으로 생생하게 담겨 있는 곳으로 벌교는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남쪽으로 가면 고흥 반도이고 동쪽에는 순천만의 한끝이 벌교 읍내의 벌교천 하구에서 손을 잡는다. 이곳에 홍예로 교각을 이룬 홍교가 자리하고 있다. 3개로 이루어진 홍예는 전체 길이가 27m, 높이 3m, 폭이 4.5m로 현재 한국의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다리이다.

▲ 벌교 홍교 홍예  

벌교 홍교 교비에 의하면 이 홍교는 숙종 44년(1718)에 당시 낙안현의 주민들에 의해 떼다리를 놓았는데 정조 4년(1728)에 전라남도 지방에 대홍수로 이 다리가 유실되자 그 이듬해인 조선 영조 5년(1729)에 순천 선암사 주지인 호암화상(護岩和尙)이 제자인 초안선사(楚安禪師)를 화주(化主)로, 습성대사(習性大師)를 공사감독으로 천거 착공하였으며 6년 후인 영조 10년(1734)에 완공하였다.

▲ 벌교 홍교 홍예 교각  

벌교 홍교의 시작은 모두 불교와 관련된 승려이다. 이것은 어느 한 곳과 다른 한 곳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라는 상징적 의미로, 사찰에 놓인 다리는 중생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 즉 차안과 피안을 이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벌교 홍교는 중요한 다리이다. 다리를 놓아 모든 사람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게 하는 월천공덕(越川功德)은 불교에서 중요하게 꼽는 보시 가운데 하나다. 이 때문에 예전 승려들 가운데는 다리 축조 기술자가 많았는데, 절뿐 아니라 민간 지역의 다리들도 승려가 놓았다는 것이 여러 개 남아 있다.

▲ 벌교 홍교 판석 

3개의 홍예(虹霓)를 연결 축조한 이 석교는 궁륭형(穹隆形)으로, 현재 남아있는 사찰의 홍교로는 경주 불국사의 연화교 · 칠보교(국보 제22호)와 청운교 · 백운교(국보 제23호), 순천 선암사의 승선교(보물 제400호), 여수 흥국사 홍교(보물 제563호), 강원도 고성 건봉사 능파교(보물 제1336호), 누각형 다리인 순천 송광사 삼청교 · 우화각(전남 유형문화재 제59호)과 곡성 태안사 능파각(전남 유형문화재 제82호) · 능파교 등이 있다. 궁륭형은 ‘시위를 당기는 활 모양으로 둥글고 하늘 위의 무지개처럼 걸쳐있는 모습’으로 마치 유럽의 건축양식의 출입문을 연상케 하는 가장 아름답고 정교한 기법으로 만들어진다.

▲ 벌교 홍교 용두 

부채를 활짝 펼쳐 높은 모양을 다듬은 석재를 정교하게 각도를 맞추어 포물선을 그리듯 맞춰 홍예를 만들고 네모나게 다듬은 돌을 홍예 사이의 면석을 쌓았다. 그 위에 밖으로 튀어나온 멍엣돌을 걸치고 잘 다듬은 난간석을 얹은 후 넓은 판석을 깔아 맘껏 거닐 수 있는 다리 바닥을 만들었다. 오랜 기간이 흐르는 동안 면석과 난간은 원래의 모습에서 많은 훼손이 있었다. 이 다리가 1981년에 중수한 지금 마을 주민들은 “엉터리 가짜다”라고 하였다. 주민들은 "당시 중수하면서 다리를 허물었는데 그곳에서 나온 돌들은 전부 다른 곳으로 가져가고 엉뚱한 돌로 쌓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옛날의 홍교에 사용되었던 돌들이 자연스럽게 배치돼있고 크기도 달랐다고 하였다. 그래서 엉터리로 만들어 놓은 가짜라고 언성을 놓인다. 그러나 관계부서는 "중수할 당시 홍교는 원래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날 정도로 훼손과 변형이 돼 있어 전부 걷어내고 새롭게 화강암으로 원형을 복원한 것"이기에 주민들이 오해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예전에 찍은 사진과 요즘 다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특히 면석 부분이 많이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전에는 지금처럼 반듯하게 가공한 돌이 아니라 막돌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벌교 홍교 교비 

3개의 홍예마다 천장 한복판에 정교하게 조각된 용두석(龍頭石)이 돌출되어 다리의 밑부분을 향하고 있다. 이처럼 다리 천장 위에 용두석을 부착시킨 것은 물과 용과의 관련해서 오는 민간신앙의 표현으로 해석되는데, 옛날에는 용의 코끝에 풍경(風磬)을 매달아 은은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고 한다.

홍교 아래 썰물 때는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는 대부분이 물속에 잠겨버린다. 주변의 풍경과 어우러져 단아한 멋을 풍기는 다리로서 주민들이 60년마다 다리의 회갑 잔치를 해주고 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공정사회
경제정의
정치개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