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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정신이 담겨 있는 ‘논산 돈암서원’ 1

  • 기사입력 2020.02.06 20:36
  • 기자명 정진해 문화재전문위원

문화재 : 논산 돈암서원(사적 제383호)
소재지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임리 74번지 외 5필지

 논산 돈암서원 홍살문 © 정진해

익산 미륵사지 5층 석탑이 오랜 베일에서 벗어나 그 자리에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는 소식에 찾았었다. 둘러보고 시간이 있어서 논산 돈암서원으로 향했다. 봄 같은 겨울 날씨에 돈암서원 가는 길은 춘곤증이 느낄 정도이다. 논산에서 연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찾아가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돈암 한옥단지 주차장에 주차하고 약 200m 떨어진 돈암서원으로 향했다.

규모에 비해 자그마한 홍살문은 다른 홍살문과 달리 홍살의 가운데에 태극무늬가 없다. 5년 전에 찾았던 그 모습에서 변한 것은 서운을 굴러 싸고 있던 담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한창 공사를 하고 있던 마당도 평탄해지고 건물 하나하나에 묻어나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했다. 서원의 외삼문 앞의 정면 5칸, 측면 2칸의 풍판을 단 맞배지붕의 건물을 받치고 있는 팔각의 장초석 위에 난간을 두르고 늠름해 보이는 누각이 시원하면서 둔중한 느낌을 주는 산앙루(山仰樓)가 있다.

 산앙루 © 정진해

산앙루라는 명칭은 산처럼 높은 스승의 학문을 보답고자 했던 제자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지만, 이 건물은 돈암서원과 함께 만들어진 건물이 아니고 최근에 이 누각이 세워졌다. 돈암서원은 산앙루 바로 뒤의 외삼문에서 시작된다.

외삼문을 중심으로 좌우로 둘린 담 내에서 여러 채의 건물이 격식을 갖추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외삼문은 3개의 문이 있지 않고 3개의 지붕을 가진 한 개의 문이 있다. 좌우의 지붕은 낮고 가운데 문은 솟아 있다. 문은 좌우의 칸의 벽으로 둘러 잇고 가운데 문으로만 출입이 가능하고 문 가운데에는 태극문이 그려져 있고 평방에 ‘팔덕문(八德門)’이라 현판을 달았다. 여덟 가지의 덕을 갖추라는 의미인 것 같다.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보면 외삼문의 좌우 칸은 모두 두 짝의 정자살문의 달린 방으로 꾸며져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돈암서원은 어떤 서원이길래 이렇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게 된다. 먼저 돈암서원은 한국의 대표 서원으로 사적 제383호로 지정되었으며, 2019년 7월 6일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한국이 서원은 조선 시대 성리학 교육기관의 유형을 대표하는 9개 서원인 돈암서원,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의 서원으로 구성되었다.

돈암서원은 1634년(인조 12)에 창건되었다. 창건 시 김장생을 주향으로 모셨고 1658년(효종 9)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을 추배 하였다. 이어 1688년(숙종 14)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宋浚吉), 1695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각각 추배 하였다. 처음에는 김장생 문인들이 스승을 추모하여 사우를 건립한 후 위패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오다 사당 앞에 양성당(養性堂) 강당을 건립하면서 서원의 단초를 이루었다.

서원은 처음 연산면 임리(숲말)에 창건하면서 돈암이라 부르는 큰 바위 이름을 일컬어 서원의 이름을 ‘돈암(遯巖)’이라 하였다. 고종 8년(1871)에 전국 서원 훼철령에서도 철거되지 않고 보존되어 오다 1881년 숲말의 지대가 낮아 홍수 때마다 서울 뜰 앞까지 물이 들어와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게 되었다.

입덕문을 들어서면 앞의 가운데에 양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동재인 거경재(居敬齋)와 서재인 정의재(精義齋)가 배치되었다. 양성당 앞에는 송시열이 쓴 ‘돈암서원 원정비’가 세워져 있다. ‘양성(養性)’이란 김장생이 마음공부를 위하여 『맹자』 「진심(盡心) 상(上)」에 나오는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存其心養其性 所以事天也]”에서 딴 이름이다.

양성당은 다듬은 돌로 2단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의 좌우 칸은 두 짝의 띠살문을 각각 달은 온돌방을 두었고 가운데 3칸의 앞에는 대청 칸을 두고 뒤편에는 토벽을 두고 좁은 쪽마루가 달려 있다. 앞쪽은 칸마다 사분합문을 달았고 뒤편에는 이분합문을 달아 여름에는 앞뒤로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양성당의 기와는 고식기와로 숭정기원후 70 정축년 4월에 만든 기와로 좌우에는 기와 제작자와 기와를 만든 기왓장 두 명의 인명이 새겨져 있다. 숭정 연호는 1628년으로 이후부터 70년 후인 정축년(1697년)에 해당한다. 기년면 기와 외에도 인면문 기와나 산형문, 화문 기왓등이 용마루, 내림마루, 귀마루 정면의 각 기둥에는 등의 끝에 배치하였다.

양성당  © 정진해

양성당의 정면 각 기둥에는 주자경재잠(朱子敬霽箴)을 쓴 주련이 걸려있다. 주자는 본당의 왼쪽에 있는 방을 경재라고 부르고, 오른쪽 방을 의재라고 불렀다. 잠언은 주지가 지어 자신의 경재에 붙여두고 스스로 경계한 글이다. 이 글은 퇴계 이황을 배향하는 안동의 도산서원에도 주련이 걸려 있다.

건물의 우측부터 주련을 보면, ‘正其衣冠尊其瞻視(정기의관존기첨시)’ 의관을 바르게 하고 그 눈길은 존엄하게 하라. ‘足容必重手容必恭(족용필중수용필공)’ 발 가짐은 반드시 정중하게 하고 손놀림은 반드시 공손하게 하라. ‘出門如賓承事如祭(출문여빈승사여제)’ 문을 나설 때는 손님을 뵈옵는 듯 단정히 하고, 일할 때는 제사를 지내는 듯 정성껏 할 것이며, ‘守口如甁防意如城(수구여병방의여성)’ 입조심하기를 병과 같이하고 뜻 방어하기를 성(城)과 같이 하라. ‘當事以存靡他其適(당사이존미타기적)’ 일에 임해서는 마음을 그 일에만 두며, 다른 곳에 두지 않도록 하라. ‘惟精惟一萬變是監(유정유일만변시감)’ 오직 정신을 하나로 하면 만 가지 변화를 보살필 수 있다.

양성당 앞의 원정비는 돈암서원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를 남기기 위해 건립한 비이다. 또한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의 학문과 성품을 칭송하는 글도 새겼다. 서원의 구조는 원정비에 새겨진 것과 지금의 구조와 비교할 수 있다. 이전에는 지금의 건물배치와는 다르게 사우 앞에 강당인 돈암서원 응도당이 있었고 그 좌우에 거경재와 정의재를 각각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비는 동춘당 송준길이 쓴 금석문 글씨 중에서 백미에 속하는 최고의 가치로 평가하고 있다. 비대는 방형으로 각 면에는 2개의 구획을 나누고 안쪽에는 十자의 안상을 새겼고 상판에는 복련을 돌려 새겼다. 비두는 팔작지붕의 가첨석을 올렸다.

양성당 앞의 동재 거경재와 서재 정의재는 같은 모양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정면 각 칸을 정면에 퇴칸에 대청마루를 두고 뒤쪽에는 두 짝의 띠살문을 단 방을 두었다. 서재와 동재는 양성이 추구하는 인(仁)을 위한 공부의 자세와 방법을 의미한다. 동·서재에서 수업하는 선비들은 마땅히 ‘거경居敬’과 ‘정의精義’로써 본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은 멀리 보이는 계룡산 줄기를 우러러보면서 [山仰], 중단 없이 김장생 선생의 호인(好仁)을 배울 것이다. 이것이 숭례사-양성당-거경재·정의재-산앙루로 이어지는 돈암서원 당호가 상징하는 교학 정신이다.

양성당의 서편에는 많은 책판과 왕실의 하사품이 보존된 장판각이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의 각 칸에는 판문을 각각 2짝씩 달았다.

장판각 서쪽에는 정회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사계 김장생의 부친인 황강 김계휘가 강학하던 건물로, 원래는 대둔산 자락의 고운사 터에 있었는데 1954년에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정면 이사 좌우에서 보면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새를 연상케 하는 건물이다. 피라미드 모양의 사각 추형 조석 위에 정면 4칸, 측면 2칸의 구조이지만, 두 칸 크기의 방 주위를 대청과 툇마루를 깐 형태여서 넓은 정자 같은 느낌을 받는다. ‘정회’라는 강당의 이름은 학습하는 정진 자세 중 고요하게 실천하면서 수행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안쪽의 두 칸의 방은 칸마다 두 짝의 띠살문을 달았고 측면에도 두 짝의 문을 달아 여름에는 활짝 열이 바람이 사방으로 통하도록 하였다.

정회당 지붕에는 눈·코·입에 콧구멍과 눈썹까지 가진 인면형 기와가 있다. 매우 보기 어려운 기와이다. 이 인면기와의 기년명은 ‘숭정 3 병오년’이란 글이 보인다. 즉 1630년에 만든 기와이다.

양성당 뒤에는 배향 공간인 숭례사가 자리한다. 삼문을 기준으로 좌우로 별도의 공감임을 알린 담장이 둘려 있다. 내삼문과 함께 연결된 담장은 문자 담이다. 담장의 아랫단에는 굵은 자연석을 쌓고 그 위에 작은 자연석 돌을 한 줄로 놓고 다시 회와 평기와를 이용하여 기하 문양을 배치하고 가운데에 평기와를 이용하여 글을 수놓았다. 화려한 담장에는 ‘地負海涵’, ‘博文約禮’, ‘瑞日和風’라 수놓았다.

담장의 좌측에서 우측으로 ‘지부해함(地負海涵)’은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바다는 만천을 포용한다. ‘박문약례(博文約禮)’는 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은 상서로운 햇살과 온화한 바람을 의미한다. 즉 위의 내용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응대하면서 지부해함과 박문약례를 실천한다면 화평하고 조화로운 세상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사계 김장생 선생의 예학 정신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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